[정윤수의 ‘서문이라도 읽자’]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

아이들 놀이를 통해 유럽사를 조망하다

아리에스는 유럽의 기나긴 역사를 방대한 사례와 치밀한 문헌 분석을 통하여 설명하고, 특히 근대로 이행하면서 ‘어린이’가 어떻게 발명되고 왜 새로운 가족주의 이념이 탄생하였는가를 살피고 있다.

네덜란드가 정치적으로는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근대적 국민국가의 기초를 닦고, 경제적으로는 동인도 회사를 설립할 정도로 식민지 무역을 강화해 나가던 무렵에 이런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다.

근세기 네덜란드의 일상이 잘 묘사된 헨드릭 아베르캄프의 ‘겨울 풍경’

여자아이들이 인형을 가지고 놀 때,
남자아이들은 더 큰 기백을 보여준다.
여자아이들이 요람으로 갈 때,
남자아이들은 나팔을 분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던 시기에 네덜란드에서도 ‘여자아이들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남자아이들은 나팔을’ 불었다. 그 나팔은 무엇인가. 노래의 후반부를 더 들어보자.

여자아이들이 부엌에서나 쓸 작은 물건들을 가지고 놀 때, 남자아이들은 강인한 사나이들을 흉내낸다.

노래의 마지막은 “무기를 든 네덜란드의 모든 혈기들이 이 땅을 지켜야 할 것임을 알고 있다”로 끝난다. 이렇게 애국주의적이며 남성주의적인 노래가 민간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네덜란드가 가부장적인 사회가 되고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로 급속히 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예로부터 이 지역 사람들은 매서운 겨울이 되면 스케이트부터 챙겼다. 지금도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 풍경을 보면 꽁꽁 언 운하 위에서 스케이팅을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스케이팅을 이용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학생이나 볼일 보러 외출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스케이트는 놀이나 스포츠 이전에 일상의 교통수단이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힘겨운 역사를 살아왔다. 바닷물 높이가 육지보다 높아서 오랜 세월에 걸쳐 제방을 쌓아야 했고, 제방을 넘어 마을로 밀려드는 엄청난 물의 재앙을 이겨내야 했다. 특히 1500년대 초반 유럽은 종교개혁의 시대였다.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종교 개혁은 스페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이기도 했다. 15~16세기는 피의 연대기였다.

마침내 1555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신·구교 간 종교 화해가 이뤄지고, 이로써 각 지역의 군주가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의 종교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되자 네덜란드는 칼뱅교를 주축으로 하여 1600년대의 이른바 ‘황금시대’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30년 전쟁의 종막을 통해 유럽 전역이 정치적으로는 근대적 국민국가가 개시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엔진이 본격적으로 가동하면서, 1648년 완전한 독립국가를 이룬 네덜란드는 근대를 향해 국가 에너지 전체를 급가속시키게 된다.

이미 100여년 전의 종교개혁 초기부터 구교의 성상을 파괴하면서 어떤 조형물에 기도를 하기보다는 글자를 익혀서 성경을 읽기 시작한 네덜란드는 세상만사를 정확하게 계산해낼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조금씩 그러나 확연히 불어나는 재산과 이로써 건사되는 가족의 안정된 일상과 자식들의 미래에 강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북유럽 르네상스, 특히 네덜란드의 이 시기 회화를 보면 시장의 풍경, 장사하는 즐거움, 하루 영업을 마치고 그날 수입을 계산하는 들뜬 표정이 빈번하거니와 그런 그림에는 어김없이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이 그려져 있다. 이때, 아이는 장사하는 사람들의 미래다.

이 시기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로 루카스 반 레이덴, 피테르 아르첸, 프란스 할스, 요하네스 베르메르, 렘브란트 판 레인 등을 꼽을 수 있다. 다른 나라의 화가들도 변화하는 풍속을 많이 그렸지만 이 네덜란드 화가들처럼 거의 두 세기에 걸쳐 활기찬 일상과 정겨운 가족, 그리고 해맑은 아이들을 그린 예는 드물다.

필립 아리에스 <아동의 탄생>

이 화가들이 다른 나라 화가들보다 착해서가 아니다. 1600년대 이후 네덜란드에서는 ‘일상생활에 대한 존중’이 다른 가치보다 더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갈 것, 언제 죽을지 모를 목숨이니 매일의 일상을 소중히 할 것, 열심히 일하고 기도할 것. 그렇게 해야 제방을 넘쳐 흐르는 바닷물을 막을 수 있었고, 멀리 항해를 떠나도 살아올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으며, 낯선 대륙에 가서도 활발하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건실한 신체가 필요했다. 밖에 나가서 활기차게 신체활동을 하는 것이 교육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일이 되었다. 17세기 중엽 헨드릭 아베르캄프의 그림을 보면 중세에서 근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농촌형 마을공동체 놀이가 근대 도시형 스포츠 문화로 변화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스케이팅, 컬링, 콜프(얼음 위에서 하는 골프 놀이) 등이 얼어붙은 빙판 위에 다채롭게 펼쳐져 있다. 이 그림에 또한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아이들이다.

특히 남자아이들!

맨 앞에 소개한 노래 즉 여자아이들이 인형놀이를 할 때 남자아이들은 스케이팅을 하고 컬링을 하고 콜프를 하면서 “강인한 사나이들을 흉내”낸다. 그것은 전통 농업사회의 낡은 가부장 풍습이 아니라 전진하는 자본주의의 신가족 문화, 남성 문화, 애국주의 문화다.

나는 지금 유럽 자본주의 형성사를 네덜란드의 스포츠를 통해 간략히 묘사했는데, 유럽의 기나긴 역사를 방대한 사례와 치밀한 문헌 분석을 통하여 설명하고, 특히 근대로 이행하면서 ‘어린이’가 어떻게 발명되고 왜 새로운 가족주의 이념이 탄생하였는가를 살피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이러한 일상 문화의 변천을 통해 유럽사 전체를 조망하고자 한다면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이 압권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아리에스는 극히 작은, 미시적인 것의 생장 전말을 분석하여 그 시대의 마음의 풍경까지 설명함은 물론 전체사까지 아우르게 한다. 이 책 ‘서문’을 보면 그와 같은 작업의 학문적 의의는 물론 그러한 학문적 실천의 압두적 증거가 바로 <아동의 탄생>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아리에스는 ‘1973년 판 서문’을 이렇게 시작한다.

“가공되지 않아서 아직도 사료로서의 신선함을 보존하고 있는 문헌의 세부 묘사와 적당한 간격을 취하지 못해, 마치 사방을 가리고 있는 안개에 휩싸여 있는 듯한 때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흔히 나무가 숲을 가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연구의 경이로운 시간은 그래도 일단 역사가가 전체적 조망을 상상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정윤수의 ‘서문이라도 읽자’

이렇게 매혹적인 문장으로 역사가의 상상력을 묘사한 아리에스는 우리가 네덜란드의 놀이문화와 회화들을 살핀 것과 같이 “산업 사회 내에서 아이와 가정이 차지하고 있는 새로운 위치”를 설명한다. 그 “결정적으로 중요하고도 괄목할 만한 관습상의 변화가 17세기 말”부터 일어났다고 아리에스는 강조하면서 전통사회에 대한 자신의 설명은 “역사가들에 의해 아주 유보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자본주의 발달과 가족 이념의 변화, 그 핵심이 되는 어린이에 대한 전혀 다른 관점의 탄생과 발전은 “거의 만장일치로 지지를 받은 편”이라고 말한다. 읽어보면, 실제로 그러하다.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