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노년의 쓸쓸함과 따뜻함이 공존

고령화 사회로 인한 다양한 사회문제들이 대두되는 가운데, 특히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에 등장하는 고독사와 노인성 치매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안고 가야 할 숙제처럼 우리 삶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강제규 감독의 동명 영화를 바탕으로 새롭게 무대언어로 쓰여진 연극 <장수상회> 또한 이러한 노인문제, 특히 치매와 고독사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러한 소재를 비판적인 시선과 심각한 문제의식으로 접근하기보다는 황혼의 로맨스와 끈끈한 가족애라는 친근한 소재로 풀어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유)장수상회문전사

연극 <장수상회>의 초반과 중반부는 아름다운 로맨스그레이가 무대 위에 풋풋하게 펼쳐진다. 이 나이 지긋한 로맨스의 주인공은 장수상회의 점장 김성칠 할아버지다. 오랜 세월 뚝심 있게 마을과 장수상회를 지켜온 김성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움직이는 부지런한 노신사지만, 마을사람들에게는 매사 까칠한 고집불통 할아버지다. 뭐든지 눈에 거슬리는 것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성질부터 내고 보는 김성칠 앞에 어느 날 낯선 여인이 등장한다. 장수상회 옆집에 꽃집을 차린 꽃집 주인 임금님, 이름은 그야말로 위풍당당하지만 실제로는 부드럽고 고운 외모에 늘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소녀 같은 할머니다.

처음에는 인사만 하던 사이였지만, 조금씩 자신의 일상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서는 임금님의 관심과 호의에 성칠은 불편하고 당혹스러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안도감을 느낀다. 보기와 다르게 적극적인 할머니와 까칠하고 방어적인 할아버지가 사사건건 부딪히면서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은 젊은 연인들의 ‘밀땅’과 다를 바 없이 귀엽고 사랑스럽게 그려진다. 특히 첫 데이트를 앞두고 당황한 성칠이 보여주는 실수와 서투른 행동들은 딱딱한 표정 안에 숨겨진 그의 순수한 마음을 보여주는 장치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연극 <장수상회>는 단순히 인생의 황혼기에 찾아온 낭만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은 아니다. 눈치 빠른 관객들은 초반부터 알아차릴 만한 비밀의 복선들이 극의 중반을 지나가면서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성칠과 금님 각자의 비밀이 풀리면서 밝혀지는 실제 상황은 앞부분에 펼쳐졌던 달달한 로맨스와는 달리 매우 현실적인 문제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며 스스로 자기 삶으로부터 고립된 남편과 남은 날이 얼마 없기에 더욱 애틋하고 안타까운 아내. 하지만 고독과 치매, 노인성 질환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부분도 결국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이기에 작품은 마지막까지 쓸쓸함과 따스함이 공존하는 무대를 만들어낸다.

문화내시경

이러한 따스함을 거드는 것은 극중 성칠과 금님을 둘러싸고 있는 그의 가족들, 그리고 가족처럼 지내는 이웃들의 시선이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모른 척 두 사람을 이어주고, 그들이 마지막 시간을 아름답게 보낼 수 있도록 뒤에서 지켜보고 응원하는 가족과 이웃의 노력이야말로 진정 두 사람의 황혼을 따스하게 만들어준 ‘숨은 로맨스’라 할 수 있다. 예능과 드라마, 영화를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배우 신구와 오랜 시간 연극무대를 지켜온 배우 손숙, 김지숙이 김성칠과 임금님 역을 맡아 세월의 무게를 담은 연기와 노련한 호흡을 보여준다. 9월 15일부터 10월 8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