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의 한해는 사실상 4∼5월 시작되어 9∼10월 절정을 이루다 12월 초반쯤 막을 내린다. 그만큼 봄 냄새 가득한 계절과 소소한 일상마저 예술이 되는 가을의 끝자락엔 흥미로운 전시들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일단 올 봄도 예외는 아니다.
우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선 ‘예술이 자유가 될 때: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1938~1965)’ 전이 관람객을 맞는다. 새롭지도 않은 전시를 기획해 놓고 성사조차 시키지 못하는 미숙한 운영으로 거센 비판에 직면했던 국립현대미술관이 개막 일정까지 미뤄가며 우여곡절 끝에 준비한 전시다.
지난 4월 28일 문을 연 이 전시는 새로운 이상향을 꿈이 아닌 처절한 현실에서 찾으려 했던, 그것이 비록 시대 제한적이고 비합리적일 수는 있어도 자유로운 예술적 상상으로 집단적 무의식에 침투해 자각과 변화를 이끈 작가들의 작품 160여점이 선보인다.

김윤아 「sorry」, 캔버스에 유채, 2017
내용을 보면 권력, 빈곤, 여성, 식민주의, 자유, 개혁, 역사 등 당대 직면한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어 저항적 메시지가 강하다. 식민지 국민으로서의 아픔을 쇠말뚝이 박힌 모습으로 표현한 카밀 알텔미사니의 ‘무제(앉아 있는 누드)’(1941)는 단순한 형상임에도 심리적 묵직함과 시각적 강렬함이 동시에 두드러지는 대표작이다. 7월 30일까지.
일민미술관이 기획한 ‘do it 2017, 서울’ 전도 눈에 띈다. ‘do it 2017, 서울’은 큐레이터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1993년 일부 작가들과 함께 한 대화 중 얻은 아이디어를 서울 버전으로 재현한 전시다. 즉, ‘만약 절대로 끝나지 않는 전시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구상을 악보처럼 지시문으로 만든 뒤 새로운 해석을 덧대는 방식의 과정예술을 한국판으로 옮긴 것이 ‘do it 2017, 서울’인 셈이다.
예술작품이 악보 혹은 시나리오처럼 제시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한 ‘do it’ 서울 전은 2013년 발간한 ‘do it 개요서’에 실린 250명의 작가 지시문 중 44명의 지시문을 김동규, 호상근, 홍승혜 등 국내 작가들의 협업으로 재구성해놓고 있다. 과정예술의 특성상 작가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참여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전시는 7월 9일 종료한다.

이충엽 「북극점에는 북쪽이 없다」,130X130 캔버스에 유채. 2017
이밖에도 성곡미술관은 통독 이후 독일 전역에서 활발히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독일 현대미술작가들의 최근 경향을 다룬 ‘독일현대사진전’(3.17~5.28)을 연다. 박근혜 하야와 탄핵을 외치며 100일간 진행된 ‘광화문미술행동’의 프로젝트를 집대성한 전시 ‘광화문미술행동-100일간의 기록’(5.1~16)도 나무화랑에서 전개된다.
몇몇 개인전 역시 시선을 모은다. 한국 근대화단에서 무게감 있는 위치를 점해온 ‘故박고석 탄생 100주년 기념전’(4.25~5.23)이 현대화랑에서 펼쳐지며, 인성의 어둠을 폭로하면서도 인간 내면의 빛과 진실함을 찾기 위한 몸부림을 담은 작가 이충엽의 전시가 한남동 ‘스페이스 아트와’에서 5월 9일부터 18일까지 지속된다.
특히 스트라이프(stripe) 시리즈를 통해 내적동기에 관한 막연한 불가능성과 가능성의 균형을 절묘하게 담아낸 작가 국대호의 작품전(인사동 통인옥션갤러리. 5.3~21)을 비롯해, 존재와 부재와 같은 철학적 질문을 사이와 틈이라는 감각적 논증으로 풀어낸 김윤아 작가의 작품전(6.16~7.6)도 부산 홍티아트센터에 마련된다. 만약 쓸데없이 경솔한 국립현대미술관의 행보를 엿보고 싶다면 ‘미인도’가 내걸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소장품 특별전 ‘균열’ 전(2017.4.19~2018.4.29)을 찾으면 된다.
<홍경한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