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 덕에 속이 뻥~ 뚫리네

헬조선의 판타지 다뤘지만 ‘사이다 전개’에 시청자 열광

KBS 2TV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김과장>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지상파 3사의 대결 중 방영 전에는 가장 ‘약체’로 평가됐지만, 4회 만에 200억원을 쏟아부은 대작 <사임당, 빛의 일기>를 제치고 수목극 시청률 1위로 올라섰다.

시청자들에게 “사이다 한 박스를 선사하고 싶다”는 방송사의 기획의도는 정확하게 적중했다. 한 회 방영될 때마다 김과장(남궁민)의 ‘활극’을 담은 클립 영상이 ‘사이다’라는 말과 함께 인터넷에서 유통된다. 드라마의 대사처럼 “의협심은 사라지고 협심증만 남은 시대”에 직장인들의 막힌 속을 사이다처럼 뻥 뚫어준다는 얘기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묘사되는 TQ그룹의 일개 경리부 과장인 김성룡이 재벌 2세이자 유흥업소 술값까지 비용처리를 요구하는 부본부장 박명석에게 “아버지가 회장이면 개념을 지하주차장에 놓고 와도 돼?”라며 떵떵 큰소리치는 장면을 보며, 시청자들의 답답했던 속은 뻥뻥 뚫린다.

재벌의 갑질, 내부고발자에 대한 탄압, 대기업의 분식회계, ‘문제 사원’에게 퇴사를 압박하는 모욕적인 대기실 발령, 그리고 노조 탄압까지. 지독한 ‘현실’의 소재를 다루면서도 이를 풀어내는 방식은 더 없이 발랄하다. 연출을 맡은 이재훈 PD가 “<김과장>은 삶의 터전을 담은 ‘오피스 활극’”이라고 소개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 KBS 제공

의인인 듯 의인 아닌 의인 같은 너

드라마 속 김과장은 꽤 복잡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다. 그의 집에는 커다란 벽면 크기의 덴마크 국기가 달려 있다. 전북 군산에서 조폭들의 자금 관리를 해주며 ‘삥땅’ 친 돈으로 덴마크 이민을 꿈꾸던 그가 더 스케일이 큰 ‘삥땅’을 위해 TQ그룹 경리부에 입성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대한민국의 변치 않는 트렌드가 뭘까요? 바로 삥땅이오. 대한민국 어디 한 군데 안 썩은 데가 없고, 안 허술한 데가 없잖아.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이야, 해먹기 천국!”을 외치는 그의 염원이 덴마크행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덴마크가 부패지수가 낮은 ‘청렴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극중 새로운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잊을 만하면 소환되는 덴마크 국기는 한국인의 ‘탈조선’ 심리를 그대로 반영한다.

김과장 입장에서는 ‘더 해먹기’ 위해, 그를 채용한 재무이사 입장에서는 분식회계 업무를 시킬 요량으로 TQ그룹에 입사하지만, 그는 얼떨결에 ‘의인(義人)’ 행보를 이어가게 된다. 그저 빙판에 미끄러져 행인을 밀쳤을 뿐인데 엉겹결에 1인 시위를 하는 내부고발자 아내의 목숨을 살리게 되고, 그저 ‘노조위원장 패션’이 궁금해 파업 중인 TQ택배 노조위원장의 조끼를 잠시 빌려 입었다가 노조의 투쟁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그를 노조위원장으로 오인한 용역 깡패들에게 납치돼 (마치 ‘비타500’을 연상시키는) ‘빙탕 5000 드링크’ 상자에 담긴 3억원의 회유자금을 받게 된 김과장은 3억원이면 꿈에 그리던 덴마크 이민자금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망설이지만, 결과적으로 이 돈을 회사로 귀속시키고 노조에 이를 알리며 다시 ‘파업을 도운 의인’으로 떠오른다.

‘어쩌다 보니’ 의인이 된 김과장은 요즘 사람들이 열광하는 캐릭터를 그대로 반영한다. 작정한 의인, 날 때부터 투사인 진지한 노동자를 그렸다면 재미는 반감됐을 것이다. 오히려 “왜 가르치려 들어? 고조선이야?”라는 냉소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사회학자 엄기호의 분석처럼, ‘광장의 조증과 일상의 울증’을 번갈아 겪으며 정의보다는 ‘리셋’을 갈망하는 사회에서 변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쉽게 ‘진지충’, ‘입진보’라는 경멸적 언어로 뭉개지는 요즘이 아니었나.

비록 현실에선 ‘미생’일지라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타임슬립 형식을 취한 <사임당, 빛의 일기>와 오피스물인 <김과장>이 나란히 방영을 시작하며 ‘판타지와 오피스물의 대결’이라는 평이 나왔지만, 사실 판타지로 따지면 <김과장>도 못지 않다. 김과장이 자신을 채용한 재무이사의 눈 밖에 나 자발적 퇴사(사실은 해고)의 관문인 ‘제2대기실’로 발령 받는 일화는 특히 그렇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대기실 동료’ 오부장은 청춘을 바친 회사에서 내팽개쳐진 좌절로 자살까지 생각하지만, 김과장은 “이제부터 개김의 위엄을 보여주겠다”며 온갖 재기발랄한 방식의 ‘버티기’에 돌입한다. ‘대기실에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회사의 방침에 안마의자와 족욕기를 가져와 휴식을 취하며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라고 천진하게 반문한다. 그가 시전한 개김으로 ‘지옥의 감칠맛’을 맛본 회사는 결국 대기실을 폐쇄하고, 김과장은 회사의 구조조정에 맞서 계열사의 회생안을 만드는 정의의 ‘드림팀’에 합류하게 된다. 소재와 배경은 대기업의 가장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현실 그 자체지만, 이런 상황을 풀어나가는 김과장의 무용담은 그 자체로 판타지다.

/ KBS 제공

그런 면에서 ‘김과장’의 계보를 굳이 따지자면 오피스물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tvN <미생>(2014년 방영)이나 대형마트 해고노동자의 실화를 배경으로 한 JTBC <송곳>(2015년 방영)보다 ‘오피스 히어로물’을 표방한 KBS <직장의 신>(2013년 방영)에 더 가까워 보인다. 코미디라는 장르가 일단 그렇지만, ‘대한민국 슈퍼갑 계약직’ 미스김(김혜수)이라는 영웅적 주인공이 이끌어가는 이야기의 전개와 그가 보여주는 약육강식 세태에 대한 풍자가 그렇다. “IMF 이후 16년, 비정규직 노동자 800만 시대. 이제 한국인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정규직 전환이 되었다”는 첫 회의 내레이션부터 심상치 않은 전개를 예고하는 이 드라마는 자발적인 계약직 ‘미스김’과 이를 깔아뭉개려는 정규직 ‘장규직’(오지호)을 통해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의 갈등과 이를 둘러싼 차별적인 현실, 그들 사이의 욕망과 비참함을 빠짐없이 짚어낸다.

김과장이 홀로 끌어가는 ‘원맨쇼’에 가까운 데 비해, <직장의 신>에서 시청자들은 자격증만 124개에 회사가 재계약을 사정하는 막강한 미스김 대신 ‘흙수저’ 계약직인 정주리(정유미)를 통해 스토리에 이입할 수 있게 된다. 은행 정규직 신분임에도 비정규직 파업에 참가했다가 홀로 살아남은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자발적 계약직’을 택한 미스김의 스토리도 삥땅 칠 궁리만 하던 인물이 갑자기 ‘의인’이 되는 <김과장>보다 설득력이 있다.

그런 면에서 <김과장>은 작정한 판타지물이다. 비록 손쉬운 판타지라 할지라도, 드라마에서까지 ‘엉망진창인 내 회사생활’을 곱씹고 싶어하지 않는 시청자의 심리를 정확하게 간파했다. 조직의 생리를 무섭도록 세밀하게 묘사해서 슬펐던, 대단한 역전극도 영웅담도 없어 더 큰 공감을 불렀던 <미생>과는 결이 다르다.

현실이 고구마일수록 시청자들은 이런 판타지에 열광한다. 재벌, 무소불위 특전사에서 아예 ‘신(神)’으로 진화해 김은숙 표 남성 캐릭터의 절정을 보여준 tvn 드라마 <도깨비>의 판타지에 열광했듯, 적어도 드라마를 볼 때는 김과장에 빙의해 대리만족할 수 있으니까. 비록, 드라마가 끝나면 현실의 ‘미생’으로 돌아오더라도.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