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칼럼]실리콘밸리 무작정 따라하기, 글쎄요?

<누가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죽이나>라는 제목의 책을 쓰긴 했지만, 사실 스티브 잡스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스티브 잡스는 미국에만, 미국에서도 실리콘밸리에만 있다. 달리 말하면, 스티브 잡스를 죽이는 한국의 특수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하지만 그 이상으로 스티브 잡스를 낳은 미국의 특수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최고령이었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언론인·작가·과학자·정치인·외교관 등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미국의 기업가 정신이 뿌리 깊게 자리잡은 것은 그만한 혁신의 전통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시장과 자본시장은 극히 유연하고, 문화는 개방적이고 수평적이며, 실리콘밸리와 같은 산학이 유기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된 클러스터가 존재해 지속적인 이민자 유입을 통한 우수한 인재 공급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세계 최대의 기술 및 서비스 시장이 존재하는 건 미국뿐이다.

중국인들이 기름진 음식을 섭취하지만 그들의 차 문화 덕에 그 부작용을 상쇄하는 것처럼, 제도는 상호 보완하는 속성이 있다. 때문에 미국의 혁신경제 생태계 중에서 어느 일부만 복제해 오면서 한국에서도 창조경제를 이뤄내겠다는 건 무한도전이 아니라 아예 무리한 도전인 셈이다.

기업가 정신과 혁신의 전통은 우리의 관료 중심 문화와 충돌하고, 유연한 자본시장과 노동시장으로의 개혁은 같은 맥락에서 한국 사회의 근간을 흔들게 될 수도 있다.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문화를 도입하기란 보수 중심 사회에서 만만치 않은 과제이고, 산학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클러스터는 정부가 돈과 땅만 대준다고 성사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속적인 이민자의 공급은 한국 사회의 재정의를 요구하는 이슈이다. 마지막으로, 전 세계 최대의 기술 및 서비스 시장은 애초에 고려할 선택지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실리콘밸리의 수도로 불리는 새너제이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IT산업 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 경향신문

즉, 실리콘밸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다고 하더라도, 실리콘밸리를 무작정 따라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무작정 따라하기는 비용만 많이 들고 기대한 성과는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톨스토이의 대작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서두처럼, 행복한 가정은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불행하다. 실리콘밸리는 그 모든 조건을 갖췄기에 실리콘밸리이지만, 실리콘밸리의 아류작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실리콘밸리가 되지 못한다.

사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실리콘밸리 따라하기가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첫째, 한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혁신을 거듭할 수 있고, 그래서 성장을 계속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둘째는 그 성장의 혜택이 정당하게 분배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특히 두 번째가 중요한 건 그간 한국 사회가 유럽의 소국가들이나 독일 등에 비해 국제화로 인한 성장의 혜택을 취약 집단에게 분배하는 데 미흡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제는 ‘따라하기’가 아니라, ‘혁신경제’와 ‘복지국가’의 가운데서 우리만의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창업국가의 원형을 보러 이스라엘을 방문한 한국인들에게 이스라엘인들은 한국이 부럽다고 이야기한다고 한다. 남의 떡이 부러운 건 인지상정이다. 스타트업이 넘치는 이스라엘은 한국의 대기업이 부럽고, 대기업만 있는 한국은 이스라엘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부럽다. 그러나 상술하였듯이, 무작정 따라하기는 답이 아니다. 우리만의 답은 우리 스스로 고민하고, 우리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해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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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는 그 모든 조건을 갖췄기에 실리콘밸리이지만, 실리콘밸리의 아류작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실리콘밸리가 되지 못한다.

김재연 <누가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죽이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