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섬세한 터치의 그림 같은 연극

정물화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생명이 없는 물건, 즉 화초, 과일, 악기, 책, 그릇 등을 그린 회화’라고 나와 있다. 학창 시절 미술책이나 미술시간을 통해 종종 접하게 되는 그림이지만, 연극 무대에서 이 단어를 만나는 것은 다소 의외의 느낌이 있다.

연극은 살아 있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만들어내는 ‘살아 있는 예술’이기도 하거니와, 하나의 극을 이루는 주된 요소는 사건과 행위라는 ‘움직이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미리 작, 성기웅 연출의 <정물화>는 이 미묘한 간극이 만들어내는 이질감 대신 고요하면서도 가슴 뛰는, 정적인 동시에 동적인 이야기를 무대 위에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의 초기작인 <정물화>에서는 뚜렷한 갈등이나 사건을 발견하기 어렵다. 보수적인 학풍을 지닌 가톨릭계 여고의 한 교실, 다섯 명의 문예부 학생들이 모여 방과 전후 부서 활동을 하며 수다를 떨고 헤어지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연극 <정물화> | 바나나문프로젝트 제공

다섯 소녀 중 한 사람인 나나코가 마지막에 자살했다는 사실이 암시되긴 하지만, 그것이 역시 이 작품의 핵심적인 사건이거나 갈등이라고는 볼 수 없다.

대신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섯 명의 여고생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감정들,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 증폭된 정서와 흔들림 같은 것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또래 소녀들처럼 별일 아닌 것에도 깔깔대며 웃다가도 문득 알 수 없는 슬픔이나 막연한 불안감에 눈물을 흘리고, 우정인지 애정인지 모를 미묘한 감정의 흔들림에 스스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들.

마치 학창시절의 빛바랜 사진을 들추듯 희미하지만 아련한 그 시절의 기억들이 무대 위 다섯 배우들 사이에서 순간순간 반짝인다. 그리고 그 모습에는 단순히 학창시절에 대한 그리움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다소 무겁고 진지한 성찰이 함께 담겨져 있다.

연극 <정물화> | 바나나문프로젝트 제공

작품의 배경이 되는 때는 4월의 마지막 날, 하얀 사과꽃잎이 숨 막힐 듯 진한 향기를 내며 흩날리는 봄의 절정이다. 여기 나오는 다섯 소녀 역시 인생에 있어 봄의 절정이라 할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희망으로 부풀어 있을 시기, 생에 대한 에너지로 가장 충만한 시기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시기는 또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죽음’을 막막하면서도 구체적인 대상으로 실감하는 때이기도 하다.

여기 등장하는 다섯 소녀 역시 끊임없이 뜬구름 잡는 소문과 수다를 늘어놓지만, 그 대부분은 누군가의 죽음, 자살, 사라짐에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어떤 이야기를 꺼내든 결국 이야기는 죽음에 관련된 것으로 끝나고 만다.

아름다운 향기로 세상을 채우고 있지만 어느 순간 흩어져버릴 사과 꽃잎처럼, 소녀들은 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맞이하고 있지만 이것이 어느 순간 사라져버릴 것임을 본능적으로 예감하고 있고, 그 막연한 불안과 슬픔이 소녀들의 사소한 대화와 행동 속에서 언뜻 언뜻 드러난다.

작품의 번역과 각색, 연출을 맡은 성기웅은 특유의 섬세함과 정교함으로 다섯 소녀의 미묘한 감성을 무대 위에 그려냈다.

문화내시경

방과 전과 방과 후 교실을 비추는 조명 톤의 변화나 미묘하게 엇갈리는 배우들의 시선, 차분한 톤으로 마음을 울리는 음악 등 테크닉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작품이 담고 있는 정서의 결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데서 연출의 섬세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3월 16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3관.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