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영화일 뿐, 의미없는 논쟁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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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변호인

영제 The Attorney

제작연도 2013년

감독 양우석

출연 송강호_송우석, 김영애_최순애, 오달수_박동호

등급 15세 관람가

상영시간 127분

개봉일 2013년 12월 18일

이 영화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자. 영화 <변호인>은 시작부터 입장과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이 영화는 실제 사건과 인물로부터 모티브를 가져왔으나 어디까지나 가공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것이 한 때 실존했던 인물 노무현을 스크린에 ‘본격적으로’ 소환한 첫번째 상업영화의 입장이다(그간 <광해>등을 통해 이미 여러번 소환되었으나 어디까지나 상징으로 기능했다).

<변호인>에게 너는 왜 올리버 스톤의 <닉슨>이 아니냐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 노무현의 삶과 카메라 사이에 적정한 긴장과 거리감을 유지하며 논쟁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텍스트가 언젠가는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변호인>이 노무현을 실명으로 거론하는 전기 영화가 아니라는 것은 현 시점이나 시장성을 고려해볼 때 세련된 선택이다. 동시에, 그 시작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지지자와 반대파의 틈바구니에서 거대 서사 속 캐릭터로 소비되었던 노무현의 삶을 감안해보면 아이러니한 노릇이기도 하다. 그는 고인이 되어서도 이야기 안에서 캐릭터의 형태로만 환영받는다.

실존 인물을 다룬 기획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선택과 집중이다. 그의 인생 가운데 어느 시점을 다루느냐의 문제다. 어느 시점의 노무현을 다루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성격과 장르, 영화가 취할 전략은 완연히 변모할 수 밖에 없다. <변호인>은 부림 사건을 선택했다. 돈 잘 벌던 세무 전문 변호사가 사회에 각성하고 정치적 아이콘으로 거듭나는 출발점이다.

그 시점 노무현의 이야기를 상업영화 기획의 틀 안에서 상품으로 풀어내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이란 그리 다양하지 않다. <변호인>은 유사 슈퍼히어로물이다. 왕따 피터 파커는 거미에 물려 큰 힘을 얻고 방종하지만 삼촌의 죽음으로 각성한 뒤 거듭나 그린 고블린과 싸운다. 무기상 토니 스타크는 재력과 재능을 믿고 삶을 즐기지만 자신의 무기가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 목격하고 각성한 뒤 거듭나 슈트를 입고 아이언 몽거와 싸운다. 고졸 변호사 송우석은 속물적 성공을 통해 꿈을 이루지만 국밥집 아들의 실종과 재판을 겪으며 각성한 뒤 거듭나 군사정권과 싸운다.

이와 같은 전략은 관객이 <변호인>의 이야기에 몰입하는데 나쁘지 않은 토대가 되어준다. 그러나 단점 역시 동반한다. 송우석의 대척점에 서 있는 차동영이 슈퍼히어로 서사의 슈퍼빌런으로 기능하다보니 지나치게 평면적인 절대 악으로만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차동영은 잘 만들어진 악당이 아니다. 그냥 나쁜 놈이다. 차동영이라는 인물의 맥락이 아버지의 죽음에 관련한 대사를 통해 느슨하게 노출되지만 충분치 않다. 악당의 합리가 온전히 보이지 않는다. 차동영은 <어퓨굿맨>의 제셉 장군이어야 했으나, 흐릿한 위압감만을 걸친 ‘그냥 악당’으로 남는다.

속물적 가치를 지향하던 전반부의 송우석이 소시민으로서의 자연스러움을 보여주는 반면, 갑옷을 두른 듯 행동하는 후반부의 송우석이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는 것 또한 단점이다. 전개만 따지고 보면 전반부와 후반부의 송우석 사이에는 그에 걸 맞는 인과관계가 부재한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저 둘 사이의 이음새에 별 다른 흠결이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일일까. 그것이 영화 <변호인>의 가장 큰 미덕이다. 그 이음새가 다름 아닌 송강호이기 때문이다.

<변호인>에는 빼어나게 훌륭한 각본도, 그것을 무마할 만큼 박력 있는 연출도 없다. 다만 송강호가 있다. 송강호가 연기하는 송우석이 술에 취해 “내가 살아온 세상은 데모 몇 번으로 바뀌는 그런 세상이 아니야”라며 비틀대는 순간을 상기해보자. 그것은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이 확신에 찬 눈빛을 가장하며 내 안의 불안을 큰 소리와 자기연민으로 무마해버리는 순간이다.

저 인물이 지금 품고 있는 감정의 맥락과 토대, 나아가 인생을 감지할 수 있게 만드는 연기는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컷 한 번을 끊지 않은 채 수 분에 걸쳐 변론을 하는 대목에서, 87년의 후기를 다루는 마지막 컷에서 또한 송강호의 표정이 빛을 발한다. 송강호의 송우석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송우석이 대한민국 헌법 1조를 외치는 장면을 가정해보자. 세상에는 송강호만이 채울 수 있는 백지가 있다. 나는 그 영화를 창피하고 간지러워서 끝까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변호인>은 잘 만들어진 상업영화다. 특히 그간 한 편의 영화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완성도는 물론 아무런 전략과 비전도 없이 낭만과 분노만을 추동하며 과거를 소환했던 영화들의 전사, 이를테면 <26년>같은 경우를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사실 <변호인>을 감상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단점은 영화 외부로부터 발견된다. <변호인>의 단점은 세상에 일베가 있다는 것이다. <변호인>의 단점은 세상에 여전히 비뚤어진 정의감만으로 모든 걸 재단하며 민폐를 끼치는 열성 노무현 팬덤이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공모자이자 공생관계인 저들은 <변호인>과 관련해서 역시 아무런 의미없는 소음만을 양산하며 논쟁의 가치가 없는 논쟁의 장을 세워 진영의 외벽을 쌓는데 골몰할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는 건 피곤한 노릇이다. 그 난잡한 판에 억지로 소환되는 건 더욱 끔찍한 일이다. 이 재미있는 영화가 재미를 찾는 관객들과 불필요한 소음 없이 만나고 헤어지길 기대한다.

허지웅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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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의 역경루
오늘을 생각한다
용산의 역경루
공손찬은 중국 후한 말 북방민족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화북의 군벌이다. 오늘날 베이징 근처 유주를 근거지로 세력을 키웠던 공손찬은 백마의종이라는 막강한 기병대를 중심으로 황건적과 만리장성 넘어 이민족들을 토벌하며 군세를 넓혀갔다.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갖췄으나 성품이 포악했던 공손찬은 폭정을 일삼으며 민심을 크게 잃는다. 왕찬이 기록한 <한말영웅기(漢末英雄記)>에 의하면 공손찬은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이유로 부하를 죽이는가 하면 유능한 관료들을 쫓아내고 점쟁이를 측근에 등용하는 등 막장 행각을 벌였다. 하루는 백성들 사이에서 덕망 높았던 관리 유우를 저자에 세워놓고 ‘네가 천자가 될 인물이라면 비가 내릴 것이다’라고 말한 뒤 비가 내리지 않자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다. 분개한 수만의 유주 백성들은 유우의 아들과 합세해 공손찬을 공격했고, 라이벌 원소와 이민족들까지 연합해 공격하니 공손찬은 고립무원에 처한다. 사방이 포위된 공손찬은 기주 역현에 거대한 요새를 짓고 농성에 들어가니 이 요새가 역경성이다. 자신의 남은 전력을 요새 건설에 쏟아부은 공손찬은 “300만석의 양곡을 다 먹고 나면 천하정세가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하고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 향락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