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혜경궁 홍씨>의 시선으로 바라본 궁궐 이야기

구중궁궐, 첩첩이 둘러싸인 그 두꺼운 벽과 담장 안에서 살아갔던 왕조의 여인들은 권력과 애욕의 소용돌이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비극을 보고도 못본 척, 듣고도 못들은 척 넘기며 살아가야 했다.

연극 <혜경궁 홍씨> | 국립극단 제공

이는 그 무시무시한 피바람 속에서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택한 생존방식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시대와 사회가 그들에게 강요한 ‘여성으로서의’ 덕목이기도 했다.

이윤택 작·연출의 신작 <혜경궁 홍씨>는 바로 그러한 시대, 그러한 궁궐 속에서 비극의 세월을 보고 겪은 한 여인이 자신의 목소리로 역사를 기록한 한(恨)의 기록, ‘한중록’(閑中錄)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500년 조선왕조를 살아간 여인 중 어느 하나 한이나 설움 없는 사람이 있으랴마는 혜경궁 홍씨만큼 기구하고 비극적인 운명을 겪어야 했던 여인도 드물 것이다.

10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했으나 시아버지 영조와 지아비 사도세자의 끝없는 불화를 감내해야 했고, 결국 남편이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해야 했으며,

어렵게 지켜낸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는 친정 식구들이 몰락해 가는 과정을 참고 지켜봐야 했던 여인. 그럼에도 질긴 목숨을 끝까지 부지하며 홀로 80천수를 누리고 간 여인이 바로 혜경궁 홍씨다.

연극 <혜경궁 홍씨> | 국립극단 제공

그간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 ‘한중록’을 소재로 한 사극이나 드라마 등은 수없이 많이 만들어지고 반복돼 왔지만, 이윤택의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역사를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여성의 주체적인 의지를 담고자 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사극들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단순히 혜경궁 홍씨의 일대기를 서사적으로, 혹은 극적으로 그리는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혜경궁 홍씨라는 여인의 입장에 서서 그녀가 보고 겪은 ‘그녀만의’ 역사를 풀어놓는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대부분의 역사서와 기록이 모두 남성에 의해, 그것도 대부분 권력투쟁에서 이긴 승자의 손으로 쓰여진 것과 달리, 모든 사건 바로 옆에서 보고 듣고도 늘 침묵을 강요당했던 여성에 의해 쓰여진 역사라는 사실만으로도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바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윤택은 극중 세 편의 ‘책’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첫 번째는 혜경궁 홍씨가 처음 입궁하고 시아버지 영조로부터 받은 ‘궁중행실서’이고, 두 번째는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가 딸에게 건네준 ‘예법서’이다.

이 두 책이 남성으로부터 부여받은, 남성이 강요하는 여성의 길을 상징한다면 극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혜경궁 홍씨가 단아한 모습으로 쓰기 시작하는 세 번째 책 ‘한중록’은 이제 자신의 목소리로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한 여성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혜경궁 홍씨의 기억과 회상을 따라가는 이 작품은 마지막 그녀의 ‘글쓰기’ 장면을 절정이자 결말로 제시하지만, 실제로 극중 정서적·감정적으로 가장 고조되는 장면은 역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바로 ‘그 날’의 기억이다.

고집스럽게 명령을 내리는 영조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도세자, 오열하는 어린 세손, 그 사이에서 무겁고도 잔혹한 침묵을 지켜야 했던 혜경궁 홍씨의 모습이 어지럽게 그려지는 이 장면은 등장인물들의 각기 다른 정치적 입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 각자의 심정을 가슴 절절하게 보여주는 명장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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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작품이 ‘한 여성의 주체적인 목소리 내기’라는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데에는 혜경궁 홍씨 역을 맡은 연희단거리패의 대표배우 김소희의 단단한 존재감과 섬세한 표현력을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12월 29일까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