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다시 찾아온 <베르테르>

‘베사모’라는 용어가 뮤지컬계의 화두였던 시절이 있었다. 무엇이든 줄여서 부르는 유행이 탄생시킨 신조어로, ‘<베르테르>를 사모하는 모임’의 약자다. ‘베사모’는 수십 번씩 무대를 찾아 반복 관람하는 뮤지컬계 마니아 관객의 탄생에도 일조를 했던 초창기 뮤지컬 동호회 문화의 산물이었다.

올 겨울, 대작 뮤지컬들의 전쟁에 <베르테르>가 다시 한 번 출사표를 던졌다. 소설의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던 예전과 달리 공연 타이틀도 간결하게 줄였다. <위키드>, <고스트>, <맘마미아!> 내한공연 등 100억원대 글로벌 흥행 콘텐츠들과의 싸움 속에서 대형 창작 뮤지컬이 용감한 도전을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반갑고 응원 보낼 만하다.

뮤지컬<베르테르>/CJ이앤엠 제공

물론 국내 공연 시장에서 라이선스 뮤지컬들이 산업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은 누구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이 챙기는’ 작금의 공연계가 지닌 모순적인 환경이나 산업구조의 문제점을 감안하면, 세밑 뮤지컬가의 첨예한 대결구도 속에서 대극장용 창작 뮤지컬이 도전장을 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 나아가 흥행까지 성공한다면 우리나라 뮤지컬계의 당면과제 하나를 해결하는 쾌거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극단 갖가지의 <베르테르>는 충분히 소중하고 의미 있는 성과다. 창작 뮤지컬임에도 ‘폐인’이란 용어가 등장할 만큼 대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와 사랑을 받았던 이력도 그렇거니와, 여러 차례 업그레이드된 무대를 통해 실험과 변화를 꾀하며 생명력을 연장시켜온 제작사의 열정은 특히 칭찬받을 만하다.

올 연말 다시 꾸며진 무대에서도 이런 노력은 예외 없이 더해졌다. 축을 이루는 줄거리는 같고 선율도 익숙하지만, 노래의 위치나 쓰임새, 극의 템포와 캐릭터의 분석에는 다시 새로운 변화를 가했다.

덕분에 베르테르가 첫눈에 반하는 롯데는 디즈니 만화영화의 ‘인어공주’ 같은 톡톡 튀는 신세대 풍의 매력마저 품게 됐고, 신분을 넘어서는 사랑을 하는 카인즈는 한층 생동감을 지닌 극적 인물로 변모됐다. 불꽃같던 짝사랑의 아픔이 극단적 선택으로 마무리되는 순간은 사그라지는 해바라기로 형상화시켰다. 이런 무대적 표현도 전에 없던 재미가 담긴 장면이다.

뮤지컬<베르테르>/CJ이앤엠 제공

오랜만에 다시 연출을 맡은 조광화의 해석도 흥미롭다. 전작에서 다소 납득하기 힘들었던 롯데의 내면적 갈등이나 알베르트의 난폭함을 보다 수월하고 무리 없게 가감하며 전개시킨다. 한층 현실감을 더하는 연출의 부드러움이 극의 리얼리티를 더해준 셈이다.

특히 커튼콜에서 박수갈채를 받는 다른 출연자들과 달리 쓸쓸히 뒤돌아 묵묵히 앉아 있는 베르테르의 뒷모습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베르테르의 성격과 이미지를 간접적으로 각인시키는 역할을 해 더욱 인상적이다. 여운이 긴 풍경이 오랜 잔향을 남기며 새로운 <베르테르>의 명장면 중 하나로 등극했다.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문학적 가치뿐 아니라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전력으로도 유명하다. 괴테는 친구의 부인에 대한 자신의 실연 경험과 학창시절 동문수학하던 벗의 자살사건을 뒤섞어 이 작품을 완성시켰다.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은 주인공에게 크게 공감했고, 심지어 자살이 번져나가는 역효과마저 일으켰다.

문화내시경

동조자살이나 모방자살을 의미하는 ‘베르테르 효과’는 이 소설의 사회적 영향력을 방증한 실례이기도 하다. 뮤지컬로 공연되는 시대적 환경은 달라졌지만, 젊은 세대들에게 순수한 감동을 주기에는 여전히 변함없을 듯하다. 아울러 창작 뮤지컬의 꾸준한 실험이 우리 공연산업의 새로운 장을 개척해줄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작품의 흥행 여부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원종원 <순천향대 신방과 교수·뮤지컬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