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권력을 좇는 자들과 삶을 지켜가는 여인들

연극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국립극단 제공

김지훈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원전유서>와 <풍찬노숙>에는 혁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인물과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삶을 지키고 생명을 키워내는 인물이 각각 등장해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주소도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을 선동해 쓰레기산의 ‘지번’을 요구한 남전(원전유서)과 자신들의 ‘역사’를 갖겠다며 세상에 도전장을 낸 문계와 응보(풍찬노숙) 등이 전자라면, 매일 남편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텃밭을 가꾸고 싹을 틔우던 어진네(원전유서)와 늘 아들에게 줄 도시락을 싸들고 언덕을 넘어오던 정갑, 응보의 아이를 품고 사는 개심(풍찬노숙) 등은 삶을 지켜내는 후자에 속한다.

극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두 작품 모두 세상을 꿈꾸는 자들(남전, 문계와 응보)이었으나 그들의 혁명은 언제나 미완으로 끝났고, 작품이 끝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이어지는 삶과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어미들의 따스한 생명력이었다.

오랜만에 연극계로 돌아온 김지훈의 신작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역시 이러한 인물 구조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이 두 인물군의 대비를 전보다 더욱 선명하고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야기의 초점을 세상을 꿈꾸는 자가 아닌 삶을 지키는 자에게로 옮겨왔다는 점에서 전작들과는 조금 다른 색깔을 보여준다.

아침밥 먹고 세운 나라가 저녁밥 먹고 망한다는 난세의 시절, 새로운 왕이 되고자 하는 도련님은 국경의 진지에서 강 너머 적들과 대치하고 있다.

연극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국립극단 제공

하지만 도련님의 진짜 적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적군이 아니라 부대 내에서 군사들의 절대적 충성을 얻고 있는 대장군이다. 자신의 왕위 계승을 확고히 하기 위해 도련님은 있지도 않은 신화와 거짓 담론을 지어내고, 유자(儒者)들과 사관을 통해 이를 정당화시키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도련님 일행은 산속에서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화전민 여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들은 얼마 전 씨종자를 빌려준 농민병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거짓 신화를 작동시키기 위해, 그리고 감히 자신들보다 높은 곳에 서 있는 여인들에 대한 불편함으로 도련님과 군대는 화전민 여인들에게 ‘전쟁터를 훔쳤다’며 전쟁을 선포한다.

몇 차례의 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도련님과 대장군, 군인들은 모두 죽고 화전민 여인들 역시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오직 생명을 잉태했던 한 여인만이 남아 아기와 함께 길을 떠난다.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에 등장하는 인물군은 매우 뚜렷하게 구별된다. 도련님, 대장군과 병사들, 독선생, 유자 등이 삶을 파괴하면서까지 세상과 권력을 꿈꾸는 하나의 축이라면, 화전민 여인들은 자기의 삶을 내어주고 나눔을 통해 생명을 이어가는 또 하나의 축이다. 두 인물군은 극중 남성과 여성, 죽음과 생명, 욕망과 희생, 고기와 곡물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해 선명한 대립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다만 여기서 ‘남성’과 ‘여성’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성의 구별이라기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혹은 삶을 이어가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와 사람을 먹여 살리는 씨종자를 맞바꾸는 행위, 자기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아기를 잡아먹는 도련님과 애써 주운 도토리를 다람쥐에게 돌려주는 화전민 여인의 대비,

문화내시경

죽음 앞에서 선홍색으로 물든 개짐을 흔들며 삶을 외치는 매지(화전민 여인)의 마지막 모습 등은 이러한 남성성과 여성성의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이라 할 수 있다. 12월 8일까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