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설국열차’ 봉준호 감독 “‘완전히 다른 세계’에 열 받는 감정을 옮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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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일까, 범작(凡作)일까. 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인터넷커뮤니티·SNS 모두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 화제다. <설국열차>다. 평론가들의 입장도 엇갈리고 있다. 영화의 결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드러내고 싶었던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은 과열양상이다. 당사자는 어떻게 말할까. 8월 1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설국열차>의 봉준호 감독을 만나 영화를 둘러싼 논란과 작품에서 담으려 했던 주제의식 등에 대해 물어봤다.

인터뷰하기 힘들겠다. 대부분 새롭지 않은 질문일 텐데,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 설명해야 할 테니.
“꼭 그렇지는 않다. <설국열차>에 대한 질문은 비교적 다양한 것 같다. 계속 같은 질문이 반복되는 영화도 있는데, ‘설국’은 궁금증을 유발하는 대목이 많아서인지 다채로운 질문이 많은 편이다.”

블로그나 SNS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체크하지 않나.
“논란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영화가 좋다는 사람과 싫다는 사람이 나뉘어서 논쟁하고 있는 걸 봤다. 처음 며칠은 열심히 읽었는데 지금은 안 보고 있다.”

“나는 사실 100% 희망적인 엔딩을 생각하고 찍었다. 한 시스템이, 한 체제가 종말을 고했고, 인류의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나는 사실 100% 희망적인 엔딩을 생각하고 찍었다. 한 시스템이, 한 체제가 종말을 고했고, 인류의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터뷰를 하기 위해 <설국열차>를 두 번 봤다. 다시 확인하니 확실히 ‘옥에 티’가 있다. 극 중에서 송강호가 분한 남궁민수가 초반에 성냥을 첸이라는 꼬마한테 뺏긴다.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다시 갖고 있게 되는가.
“그것뿐만 아니라 ‘디테일’에서 의문을 품을 만한 대목이 서너 군데 있다. 사실 첸이 갖고 있었던 성냥을 남궁민수가 ‘야 임마 이거 내놔’ 하고 꿀밤을 때리면서 다시 가져가는 장면을 찍었다. 그 장면은 극의 흐름상 편집과정에서 잘라냈다. 섬세하게 본 사람은 의문을 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라스트 신에서 흑인 남자애가 입고 있는 털옷도 마찬가지다. 원래 약에 취해서 막 싸우는 사람들 중 그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계속 보여준다. 그것도 남궁민수의 딸 요나가 뺏어서 흑인 남자애에게 가져가는 장면이 있는데 영화의 ‘리듬’에 저해되어 편집했다.”

엔딩 장면에 대해 지금 말이 제일 많다. 엔딩 장면에 등장하는 북극곰을 두고 ‘기승전콜라’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들어봤나.
“공감한다.(하하) 기승전콜라라….”

북극곰은 지구온난화 해결의 아이러니를 보여주기 위해 등장시킨 것인가.
“그렇다. 지구온난화의 슬픈 현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줄어든 얼음조각 위에 올라선 북극곰의 비극이 흔히 예시된다. 어떻게 보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이 영화에서는 바깥 세상의 생명이 멸종되었다고 설정했다. 나는 사실 100% 희망적인 엔딩을 생각하고 찍었다. 한 시스템이, 한 체제가 종말을 고했고, 인류의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마지막에 남은 아이들이 아담과 이브 아니냐는 해석이 있는데 그 해석이 맞는 것인가.
“기차 밖으로 나온 요나가 모자를 싹 벗는다. 숨도 쉬어지는 것이다. 정말 얼어죽을 것 같으면 그렇게 했겠나. 숨을 쉬는 게 가능한 정도로 온도가 올라가 있고, 또 생명체를 본다는 말이다. 비관적 엔딩으로 본 사람들은 이들이 그 곰한테 잡아먹히리라고 생각한 건가.”

어쨌든 생존하기 힘들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렇긴 하다. 딱 기차에서 나왔는데, 눈 덮인 산모퉁이를 돌았더니 거기 마을이 있고 모닥불이 타오르고, 이렇게 설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지만, 여전히 그것은 가시밭길일 것이고. 그렇지만 잘 헤쳐나가기만 바랄 뿐이다. 중간에 보면 ‘얼어 죽은 7인’이라고 나온다. 교실에서 창밖을 봤을 때 기차에서 나갔다가 얼어 죽은 사람들이다. 하나의 체제를 전복하거나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려고 한다면 분명히 희생이나 대가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얼어 죽은 것은 기차 안 교실에서 매년 학습교재로 사용된다. 말하자면 ‘쟤네 봐. 너희들 나가면 저 꼴 된다’는 경고로 사용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갈 생각을 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열린 결말이라고 생각했는데,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거네. 사실 기후변화 문제는 좌나 우, 진보나 보수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엔딩을 CW-71이라는 물질을 사용하면서, 지구온난화의 희생의 상징이었던 곰은 살아남고 인류는 생존이 불투명해졌다는 메시지로 읽었다.
“일단 엔딩 장면에 깔려 있는 음악을 보라. 상당히 포지티브한 음악이다. 그리고 여자애와 남자애가 살아남은 것으로 상정했다. 아직 후손이 생기려면 좀 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겠지만,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다. 물론 앵글로 색슨이 멸종했지만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고….”

지구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 CW-71이 살포되는 시점이 2014년 7월 1일 오전 6시다. 왜 그때로 설정했나. 혹시 원작에 그런 언급이 있었나.
“원작과는 아주 다르다. 원작에서 가져온 것은 사실 기본 세팅 즉, 생존자들이 열차에 있고 바깥은 빙하기, 그런데 열차 내 사람들의 계급은 나누어져 있다는 정도다. 2014년으로 내가 설정한 이유는 ‘개봉한 바로 다음해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일종의 근미래 혹은 현재의 느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사실 사건이, 스토리가 벌어지는 때는 2031년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2031년에서 2032년으로 넘어가는 때의 이야기다.
“그렇다. 사건이 벌어진 후 17년에서 18년째 되는 때인데 사실상 기차 자체가 거대한 움직이는 타임 캡슐이다. 2014년 이후에 정지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게 어떻게 보면 그때부터 멈춘 것이다. 영화에서 마모되고 멸종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중요하다. 총알이 ‘멸종’되었고 담배가 멸종되었다. 기계부품도 마찬가지이고, 그것을 대신해 아이들이…, 마모된다, 멸종된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다. 열차의 엔진을 고안한 윌포드는 뭔가 영원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학교에서는 그것을 가르치지만 사실은 시간은 멈춰져 있고 마모된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영원이라는 것은 허구라는 것이다.”

영화 <설국열차> 촬영현장에 선 봉준호 감독. | 모호필름

영화 <설국열차> 촬영현장에 선 봉준호 감독. | 모호필름

열차의 동력원이 영화에서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원작 만화의 설정을 따르면 열차의 엔진은 영구기관인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추측해 봤다. 영구동력 기관은 인류 역사상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열역학 법칙에 위배되어 불가능한 것이다. 이게 판타지가 아니고 SF이다 보니까 굳이 과학적 근거를 찾는다면 윌포드가 만든 엔진은 일종의 핵융합 원자로가 아니었을까 상상을 해봤다. 미국에 펜실베이니아호라는 핵잠수함이 있는데, 이론적으로 연료를 재주입하지 않아도 20년에서 25년 동안 바닷속에서 운항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잠수함은 석 달에서 6개월에 한 번씩 항구에 들어가곤 하는데, 그건 사실 승무원들의 식량이나 정신적 문제 때문이라고 들었다. 핵심은 엔진의 영원성은 허구였다는 것이다. 영원하다고 신성시하고 ‘엔진은 성스럽다’는 식으로 포장하지만, 사실은 부품이 마모됨에 따라 아이를 거기에 넣어서 유지하는, 어떤 초라하고 참혹한 모습이 진실이었다.”

평론가들의 리뷰를 봤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상징한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반면 ‘SF나 판타지는 그들 자신이 상정한 세계관에 충실해야지, 자꾸 현실에 대한 상징만 찾으면 작품의 세계를 왜소하게 만든다’는 반론도 있었다. 감독이 영화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보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명시적인 표현은 없고 미국 월가에서 벌어진 점령(occupy)운동에 대해 말한 것은 있다.
“월가의 점령시위도 기자 양반들이 물어보니까 답한 것이다. (하하) 사실 주로 이야기한 것은 비행기의 이코노미 칸 같은 비유였다. 비행기가 이코노미, 비즈니스, 퍼스트 클래스로 칸이 나뉘어 있지 않나. 보통, 이코노미 칸에 탄 사람들은 12시간 동안 시달리면서 오다가 착륙하고 앞쪽 문으로 내릴 때 처음으로 비즈니스나 퍼스트 클래스 칸을 지나가게 된다. 자리도 넓고, 의자가 막 수평으로 젖혀져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에이씨, 이 사람들은 이렇게 왔다는 말이야’ 하는, 확 열 받는 그럴 때가 있지 않나. 똑같이 12시간 타고 온 것인데 ‘완전히 다른 세계’인 것이다. 그런 감정을 영화로 옮기고 싶었다. 근본적으로 그것이 봉건주의건,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실패한 어떤 체제이건 간에 시스템 자체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고, 그것을 기차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상징적으로 풀려고 했던 것이다. 아주 구체적으로 신자유주의, 그런 건 잘 모르겠다. 시스템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고, 보다 본질적인, 더 추상화된 형태로 이야기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 SF의 매력이 아닐까.”

더 궁금한 것이 있다. 열차의 뒤 칸과 앞 칸을 사회의 계급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로 생각한다면 영화에서 그리는 세상은 아큐파이 운동의 99대 1%의 사회도 아니고, 무산자와 유산자가 대립하는 전통적인 좌파적인 세계관도 아니다. 사실 이 체제가 정상적으로 굴러간다면, 앞 칸의 가진 자들이 완전히 자급자족이 가능하지 않나. 뒤 칸의 사람은 그냥 무임승차자, 일종의 잉여에 불과한 것이고.
“물론 과거 미국 남북전쟁 당시 노예노동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미국 남부의 목화밭 같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뒤 칸 사람들을 휴먼리소스, 그러니까 노예 풀처럼 쓰는 것은 사실이다. 첫 장면이 뒤 칸에서 바이올린을 켤 수 있는 사람을 차출하는 것인데, 아우슈비츠도 다 가스실로 차례로 보내지만 기술이 있는 유대인은 더 오래 살려놓았었다. 앞쪽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여러 인력자원을 활용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유지시키는 것이다. 만약 필요하지 않았다면 다 몰살시키거나 뒤 칸을 떼어내버리면 되는 것 아니었겠나. 자신들이 절대 하고 싶지 않은, 할 수 없는 극한의 3D 노동은 뒤 칸의 꼬마애들을 데리고 와서 하는 것이고.”

그런데 영화가 깔고 있는 것은 혁명이나 그 세상을 바꾸기 위한 운동에 대한 냉소인 것 같다. 나중에 폭로되는 뒤 칸의 지도자였던 길리엄과 윌포드의 관계도 그렇고.
“이 스토리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주인공 커티스가 길리엄으로부터 윌포드로 가는 여정이다. 기껏 온갖 고생과 희생을 치르고 윌포드까지 갔더니, 결국 윌포드가 길리엄이었다, 그 둘이 하나였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내적으로 붕괴되는 스토리다. 사실 스포일러에 해당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끝부분에서만 드러난다. 길리엄을 연기한 존 허트는 그것을 다 전제하고 연기했다. 그래서 커티스를 계속 말린다. 커티스에 대한 애정은 있으니 ‘꼭 가야겠냐, 여기까지 온 것도 많이 온 게 아니냐’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결국 어느 시점에 커티스가 통제되지 않자 길리엄은 슬픈 얼굴로 그를 내보낸다. 관객 입장에서는 그게 끝에 다 가봐야 아는 것이니, 그것을 다시 돌이켜 생각해볼 필요가 있으니 이 영화는 두 번 보면 훨씬 더 재미있다. 반복관람하시라. (하하)”

남궁민수의 입장이 재미있다. 일종의 아나키스트라고나 할까.
“일종의 극 후반에 투입되는 ‘조커’의 역할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정말 확신한 것일까. 문 밖으로 나가면 살 수 있다고.
“대사를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10년을 꾸준히 관찰해 왔다고. 에카테리나 다리에서 비행기를 10년 동안 꾸준히 관찰했다. 10년 전에는 꼬리만 보였는데 이제 다 보인다고. 심지어 자기 딸과도 같이 나갈 비전이 있기 때문에 그로서는 아주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얼어붙은 7인’의 맨 앞의 여자가 에스키모 이누이트 여자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아마 누구나 상상하겠지만 그 여자가 바로 남궁민수의 부인, 요나의 엄마일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상상은 아닐 것 같다.
“내가 상상했던 서브스토리는 이것이다. 영화에 묘사하지는 않지만 그 부인 내지는 요나의 엄마는 ‘얼어붙은 7인’ 반란의 주도자인데, 주도자일 수밖에 없는 게 그가 에스키모 이누이트 출신이기 때문이다. 추위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다, 이거다. 하지만 너무 일찍 나갔다. 혁명을, 시스템 전복 내지는 탈출을 너무 일찍 한 것이다. 그때가 요나를 낳은 직후였을 것 같은데, 15년 전에 ‘얼어붙은 7인’ 혁명이 일어났다고 하니까 요나는 한두 살 때였을 것이다. 남궁민수는 따라 나가지는 못했을 것 같다. 대신 자신이 기차에서 아직 어린애를 돌보고, 그 일곱 명이 먼저 나가 거기에 어떤 정착촌이나 커뮤니티를 만들면 어차피 1년 후엔 기차가 다시 돌아오니. 1년 후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남궁민수는 애를 맡았고. 그런데 설레는 마음으로 1년 후에 그 자리에 돌아와 봤더니 고개 하나를 못 넘고 거기서 얼어 죽어 있었던 것이다. 남궁민수는 그 후로 오랫동안 그 비전을 포기하지 않고 신중하게 되짚어봤을 것이다. 확신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딸에게 이야기했을 것이고.”

이전 영화들까지 다 합쳐서 이야기한다면, 혁명이나 운동에 대한 냉소적 시각, 그런 것도 결국 시스템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냐, 그런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를 든다면 <괴물>의 뚱게바라는 386세대의 전형성을 갖는 인물로 상정한 것인가.
“전형성을 갖는 인물은 아니다. 박해일도 끝까지 싸우지 않나. 그런데 뚱게바라 같은 인물들은 분명히 있고. 그 혼란 속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고. 하지만 설국열차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결국은 혁파시켜 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 입장은 명확하다.”

봉준호라는 이름에 거는 사람들의 기대, 부담이 많지 않나.
“당연. 어떤 사람이 ‘나 자신의 과거 작품과 계속 싸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건 모든 감독들에게 공통된 숙명일 것이다.”

호불호가 유난히 극단적으로 나뉘고 있다. 왜 그런 것 같나.
“모르겠다. 이 영화 프로젝트가 워낙 4~5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무슨 대작이고 외국의 유명배우가 나오고 글로벌 어쩌고 하는 여러 수식이 붙어 있었다. 이미 프라이팬이 달궈질 대로 달궈진 상태에서 음식을 놓은 것 같다고나 할까. 감자를 올리든 고기를 올리든, 아니면 생선을 올리든 불이 확 탈 수밖에 없는. 행복한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경험해 봤지만 아무런 관심도 못받고 극장에서 간판을 내린 그런 영화들도 많은데. 영화를 어떻게 보든지 다 고마운 일이다.”

<글·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사진·홍도은 기자 hongd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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