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한국식 각색 ‘스칼렛 핌퍼넬’

요즘 뮤지컬 무대에선 프랑스 대혁명이 대세다. 난세에 영웅담이 인기를 누리는 것처럼, 현실의 문제를 역사 소재의 문화 생산물을 통해 위로받고자 하는 무의식의 발로 같아 흥미롭다. 물론 격동의 시대적 배경이 음악과 안무, 연기로 구현되는 뮤지컬의 비장함과 잘 어울리는 이유도 크다. 그러나 요즘 텔레비전 사극이 인기를 누리는 이유처럼, 역사 소재 이야기들이 주는 재미는 사실 사료로서의 가치보다는 현실을 빗대 풍자하는 데서 오는 대리만족일 때가 많다. 뮤지컬 공연가의 경우도 크게 다를 바 없을 듯싶다.

프랑스 대혁명을 소재로 삼고 있는 작품들로는 지난해부터 인기를 누려온 ‘레 미제라블’과 재공연이 되고 있는 ‘두 도시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올 여름 새롭게 도전장을 내민 작품이 하나 더 생겼다. 바로 뮤지컬 ‘스칼렛 핌퍼넬’이다. 스타급 배우들의 캐스트와 화려한 볼거리를 앞세워 뮤지컬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좋은 매출 실적을 이어가고 있다.

뮤지컬 <스칼렛 핌퍼넬> | CJ E&M 제공

흥행 요인이야 한둘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두드러진 특징을 따져보자면 우선 작곡가를 떠올리게 된다. 뮤지컬 ‘스칼렛 핌퍼넬’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미국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이 만든 1997년 브로드웨이산 뮤지컬이기 때문이다. 뮤지컬 작곡가의 대명사처럼 떠오르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90년대 초반 동시에 네 작품을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리며 전성기를 구가했다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나라 뮤지컬 시장의 최고 수혜자는 아마도 프랭크 와일드혼일 것이다.

그는 ‘지킬 앤 하이드’, ‘황태자 루돌프’, ‘천국의 눈물’을 통해 한국 관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고, 올 전반기에는 ‘스칼렛 핌퍼넬’, ‘몬테 크리스토’를 동시에 공연하는 진기록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조만간 선보일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와 12월 개막 예정인 뮤지컬 ‘카르멘’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의 와일드혼의 폭주는 감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다. 비슷한 선율과 리듬의 반복으로 자기 복제에 대한 논란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감미로운 서정성과 수려한 멜로디는 우리나라 관객들의 정서적 코드와 서로 잘 통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뮤지컬 <스칼렛 핌퍼넬> | CJ E&M 제공

또 다른 흥행 요인은 과감한 현지화가 가져온 작품의 변화다. 사실 ‘스칼렛 핌퍼넬’은 초연 당시 브로드웨이 공연가에선 신통찮은 흥행을 기록했다. 프랑스 로베스피에르 시기의 공포정치에 대한 해석은 미국인의 시각을 넘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고, 무협지 수준의 활극에 가까운 스토리 라인 역시 아쉬움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대극장 뮤지컬 시대가 몰락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이 뮤지컬은 때를 잘못 만난 비운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2013년 여름 우리나라에서 이 작품은 “블링 블링”이라는 극중 대사가 상징하는 것처럼 한국식 유머와 조크로 재무장하는 변화를 겪었다. 의상과 무대 역시 순정만화 속 이미지처럼 동양인이 상상하는 서유럽 귀족사회라는 고풍스런 시대극 이미지를 덧입혀 별스럽고 재미난 틀을 갖추게 됐다. 원작의 유명세에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이 다한 콘텐츠를 가져다 다시 새롭게 각색하고 가감해 새로운 재미를 더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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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예는 비단 우리 뮤지컬계에서만 목격되는 것도 아니다. 시장이 발달할수록 남의 것을 재가공해 새로운 문화상품으로 만들어내는 뮤지컬 제작방식은 왕성하게 시도된다. 일본 극단 시키가 만든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중에는 가부키의 공연 양식을 차용해 만든 것도 있다. 레 미제라블과 트레버 넌이 영국 국립극장 예술감독 시절 만들었던 일련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가파른 성장이 남다른 우리 뮤지컬계로서도 앞으로 꿈꿔볼 만한 재미난 실험들이다. ‘스칼렛 핌퍼넬’의 흥행이 특히 반가운 이유이기도 하다.

원종원 <순천향대 신방과 교수·뮤지컬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