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강렬하고 묵직한 <레이디 맥베스>

어둡고 무거운 무대, 느리고 긴 호흡으로 인간 깊숙한 곳을 파고드는 힘, 소리와 물체의 이미지를 드라마와 절묘하게 결합시키는 솜씨 등 연극 <레이디 맥베스>는 연출가 한태숙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간 국내외 무대에 꾸준히 오르며, 공연될 때마다 많은 관심과 화제를 불러 모은 바 있는 극단 물리의 <레이디 맥베스>가 초연 15주년을 맞아 오랜만에 대학로 무대에 다시 올랐다.

<레이디 맥베스>는 맥베스를 부추겨 왕위에 오르게 한 맥베스 부인이 몽유로 시달리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이를 최면으로 치료하고자 하는 전의가 그녀의 내면 깊은 곳을 파헤치면서 깊숙이 숨겨진 죄와 양심을 끄집어내는 팽팽한 심리극이다. 최면 상태로 과거를 재현하면서 레이디 맥베스는 형벌 같은 죄의식의 고통을 느끼게 되고, 이로 인해 자꾸 최면을 거부하려 든다. 최면 상태를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그녀에게 단번에 꽂히는 주문이 하나 있으니, 바로 “맥베스 만세! 이제 왕이 되었다!”란 외침이다. 이 장면들은 그녀가 얼마나 권력 지향적인 인물인가를 강조하며 보여주는 장치다.

연극 <레이디 맥베스> | 극단 물리 제공

사실 <레이디 맥베스>는 속죄와 구원이라는 이야기 자체보다 죄의식을 파고들어가는 그 과정이 더 흥미로운 작품이다. 최면을 유도하는 전의와 시종들은 처음에는 순수한 목적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집요한 악의를 띠며 레이디 맥베스를 농락하고 마지막에는 신적인 존재처럼 군림하며 그녀를 단죄하려 든다. 특히 맥베스 시늉을 하며 레이디 맥베스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던 전의는 점차 그 속에 빠져들어 마치 희생양을 앞에 둔 제사장이 된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무릎을 꿇으라고 고함을 치며 끝내 레이디 맥베스로 하여금 죄를 토로하게 만드는 전의의 모습은 속죄를 구하는 그녀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며 “사람이 어떤 자격으로 다른 사람을 단죄할 수 있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또 한 가지, <레이디 맥베스>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오브제의 사용이다. 이 작품에서는 물체, 소리, 빛이 모두 배우 역할을 한다. 이들은 단순한 소품과 효과를 넘어 그 자체로 생명과 성격을 지닌 배우가 되어 작품에 개입하고, 사람과 물체의 언어가 부딪히는 순간들은 신선한 충격을 주며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물, 흙, 밀가루 등 단순한 소재들이지만 무대 위에서 그 소재가 갖는 언어는 끊임없이 변해간다. 물이 얼음이 되고, 흙과 만나 진흙이 되고, 밀가루가 반죽이 되는 식이다. 그러면서 생겨나는 물체의 특성들은 정화(물), 순수(밀가루), 죄(진흙)와 같은 의미를 지니며 극의 주제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연극 <레이디 맥베스> | 극단 물리 제공

그간 이 작품이 공연될 때마다 지독한 몰입과 집중력을 보여주었던 배우 서주희와 정동환이 이번에도 레이디 맥베스와 전의 역을 맡았다. 15년간 이 작품과 함께 해온 두 배우의 연기와 호흡은 여전히 놀라운 힘으로 객석을 압도한다. 여기에 초연부터 물체극 창작을 맡았던 이영란이 오브제 시종을 맡고 안무가 박호빈이 움직임 시종을, 박우재와 정마리가 음악 시종을 맡아 극과 움직임, 그리고 물체들에 풍부한 소리와 리듬을 덧입힌다.

문화내시경

관객의 내면 깊숙한 곳을 파고들며 주인공의 죄의식에 동참하게 만드는 <레이디 맥베스>는 확실히 쉽고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이 무대에는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 강렬함이 있다. 살갗을 파고드는 그 생생한 느낌은 분명 일상이나 보통 무대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짜릿한 경험이다. 6월 16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