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연해주 조선인 마을로 온 <그리스인 조르바>

연극 <라오지앙후 최막심>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 학창시절 수많은 이들의 다이어리나 수첩 앞머리를 장식하며 자유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을 불러일으키곤 했던 이 문구는 그리스의 위대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남긴 말이다. 크레타 섬에 있는 그의 묘비명이기도 한 이 말은 작가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문구인 동시에 그가 자신의 모든 신념을 담아 창조해낸 한 인물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바로 그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다.

연극 <라오지앙후 최막심> | 명동예술극장 제공

조르바는 자유인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화자인 ‘나’는 크레타 섬으로 향하는 배를 기다리던 중 한 강렬한 눈빛의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크레타 섬으로 넘어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글쟁이로 살아오면서 늘 삶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로 일관해온 ‘나’는 거침없는 삶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조르바를 바라보며 새로운 삶의 철학을 깨닫게 된다. 온몸으로 그리고 온마음을 다해 삶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조르바의 모습은 그 자체로 ‘나’가 글로 배워왔던 어설픈 철학들을 가차없이 부수며 진정한 삶의 의미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배삼식이 번안하고 양정웅이 연출을 맡은 연극 <라오지앙후 최막심>은 바로 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원작으로 삼고 있는 작품이다. 번안을 맡은 작가 배삼식은 이 작품의 배경을 피레우스 항과 크레타 섬이 아니라 1940년대, 격동기의 블라디보스토크 항과 연해주로 바꾸었다. 원작의 ‘나’는 유약한 지식인 김이문으로, 조르바는 ‘떠돌이’란 의미의 ‘라오지앙후’ 최막심으로 바뀌었고, 그가 들고 다니던 전통악기 산투르 선율은 애수 어린 손풍금의 멜로디로 되살아났다. 새파란 지중해를 배경으로 살아가던 크레타 섬의 주민 역시 식민통치를 피해 머나먼 연해주 땅까지 밀려온 뒤, 흙먼지 풀풀 날리는 이 땅에서 아편을 키우며 살아가는 조선인 마을 사람들로 탈바꿈했다.

연극 <라오지앙후 최막심> | 명동예술극장 제공

지중해의 크레타 섬과 연해주의 조선인 마을. 얼핏 보면 전혀 낯선 조합처럼 보이지만, 작가 배삼식은 이 두 공간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공통점을 읽어낸다. 크레타 섬은 그리스이면서도 본토에 완전히 속하지 않은 경계적 공간으로, 터키와 그리스 사이의 전쟁 속에서 참혹한 분쟁을 겪은 지역이다. 한편 작품의 배경인 연해주는 식민지시대 많은 조선인들이 본토로부터 이주했던 대표적 지역이다. 그리고 이곳 역시 러시아와 일본이란 양 대국의 세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았던 경계적 공간이다. 원작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카잔차키스가 단순히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자유인을 그린 것이 아니라 치열한 현실을 살아가는 진짜 인간을 보여주고자 했듯이, 이 작품 역시 최막심이란 인물을 통해 암울한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갔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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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양정웅 연출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당대 유행한 근대가요와 러시아 민요, 아리랑 등 다채로운 음악을 통해 더욱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애수 어린 손풍금 멜로디와 최막심의 노래, 구슬픈 트럼펫 연주와 마을 사람들의 구음 등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지역적 색채를 담아내면서 동시에 인물들의 복잡다단한 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실제 무대 위에 등장하는 기타, 우쿨렐레, 트럼펫, 아코디언 등 다채로운 악기들의 라이브 연주는 이러한 음악에 한층 살아있는 질감을 부여한다. 음악이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주인공 최막심 역을 맡은 뮤지컬 배우 남경읍의 존재감도 빛을 발한다. 특히 무대 위를 성큼성큼 걸어다니면서 손풍금을 타거나 노래를 부르고 자신의 온 존재를 춤으로 표현할 때, 무대 위 남경읍은 떠돌이 최막심만큼이나 자유롭고 편안해 보인다. 6월 2일까지 명동예술극장.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