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윤명로-정신의 흔적’

“예술가란 모방을 허락 받지 못하고 태어난 고독한 존재들이다. 피카소는 ‘훌륭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말했지만,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분명 ‘예술은 모방이 끝날 때 시작한다’는 얘기였을 것이다.”

한국 현대추상회화의 대표적 원로 작가인 윤명로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77)는 화업 50년을 맞고 있지만, 지금도 창작열을 불태운다. 윤 화백은 “사실 내가 지루한 것은 못참는다. 내가 지루하면 관람객들은 얼마나 더 지루할까”라며 치열한 작업정신을 강조한다. 서울대에서 30년간 교수로 있은 그는 “내가 변해야 학생들도 변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윤명로 <고원에서 MXⅡ-910> (2012년)

윤 화백의 뜨거운 지난 50년 작품활동을 한 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는 자리가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마련됐다. 6월 23일까지 열리는 ‘윤명로-정신의 흔적’이다.

전시장에는 1950년대말부터 신작까지 모두 60여점이 선보이고 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추상회화의 경지를 개척해온 백발의 노 작가 작품들은 관람객들을 숙연하게까지 한다. 특히 시대별로 내걸린 작품들은 10년마다 크게 변하는 그의 작품세계를 잘 보여준다.

60년대 그의 초기작들은 당시 미술계를 휩쓴 앵포르멜 추상회화의 경향이 짙다. 사르트르의 소설 ‘벽’의 사형수를 소재로 삼은 ‘벽A’(1959년), 파리 청년비엔날레에 출품돼 주목을 받았으며 지금도 당시 물감을 바른 작가의 손가락 흔적이 화면에 생생한 ‘회화M.10’(1963), ‘문신 63-12’ 등이 대표적이다. 기존 질서·양식에 대한 부정, 음울하고 피폐했던 시대상황 속에서 젊은 예술가의 고민이 드러난다. 실제 그는 13명의 동료와 ‘60년 미술가협회’를 창설, 덕수궁 담벼락에 작품을 내걸며 반 국전을 선언해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70년대는 연작 ‘자’와 ‘균열’로 대표된다. ‘자’는 청회색·흰색 등 단색조의 색채에 엄격한 화면구성 등으로 차분한 분위기가 강하다. 물감 등 재료가 화면 위에서 비정형적으로 갈라지는 ‘균열’ 연작은 우연성 효과를 이용한 새로운 형식의 회화작품이다. 80년대는 연작 ‘얼레짓’(연실을 감는 ‘얼레’와 ‘얼레빗’에 행위 명사인 ‘짓’을 합성한 단어)시대다.

윤 화백은 90년대 들어선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통해 느낀 경외감을 대형 화폭에 강렬하게 담아낸다. 자연의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연작 ‘익명의 땅’이다. 충북의 한 대형창고에서 작업을 한 ‘익명의 땅 91630’은 가로 길이가 13m에 이른다. 작가는 “당시 평면 속에서 공간의 깊이를 보았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