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고수 임영욱씨
젊은 고수를 만나러 마포 서교동에 갔다. 임영욱씨(30)는 젊은 소리꾼들 여럿이 모여 만든 창작 판소리 단체에서 작가 겸 기획자로 일한다. 물론 고수이기 때문에 공연을 할 때는 소리꾼 옆에 앉아서 북을 친다.
임영욱씨를 처음 알게 된 건 2년 전쯤이다. 내가 운영하는 헌책방에서 판소리 공연을 했는데, 북 치는 사람으로 꽤 젊은 사람이 따라와서 놀랐다. 젊은 외모에 차림새도 말끔해서 판소리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런데 공연을 시작하니까 그 모습이 금방 달라졌다. 심각한 눈빛으로 소리꾼의 동작 하나하나를 조율하고 구성진 추임새까지! 북을 칠 때만큼은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그저 고수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수십명 관객을 압도했다.

임영욱씨가 키우는 고양이와 함께 책장 앞에 앉아 있다.
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다고 하니 책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많을 줄 알았다. 그런데 실상 책은 많이 읽는 편이 아니라고 말한다. 성격 탓인지 많이 읽는 건 아니지만 한두 권을 읽더라도 거기에 푹 빠져서 많은 걸 느끼려고 한다. 그래도 대학에서 공부하던 때는 책을 많이 본 편이다. 지금은 사는 게 빠듯하다보니 마음에 여유도 없고 좋아하는 책이 있더라도 비싸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 많이 읽지 못한다.
임영욱씨는 문학작품, 그리고 그런 작품을 쓰는 작가들을 늘 동경하고 있다. 책을 많이 읽을 때는 그런 동경을 뛰어넘고 싶은 마음에서 일부러 인문학 쪽 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사회과학과 환경, 페미니즘 분야 책을 주로 읽었다. 그때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영국의 여성해방이론가인 미셀 바렛이 쓴 <가족은 반사회적인가>(여성사·1994년)라는 책이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책을 통해 임영욱씨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시켰는지 느꼈다. 그 외에도 여러 책을 통해서 사회라는 큰 틀을 넓게 보는 시각을 얻게 되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는 건 또다른 문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철학이 있어야 한다. 임영욱씨는 그렇게 읽은 많은 책들을 통해서 자기 철학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눈을 얻은 셈이다.
이야기를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방이 크지 않아서 책도 많지 않은 편이다. 고작해야 책장 두 개에 들어 있는 책이 200여 권 정도 될까 싶었다. 크지 않은 책장이지만 그 나름으로 정리를 해놨다. 임영욱씨가 하는 정리방법은 소설, 사회과학, 산문을 세 가지 큰 틀로 삼아 서가를 따로 마련해놓는 것이다. 그 외에 판소리나 우리 전통문화에 관련된 책은 또 따로 보관한다. 큰 분류로 나눈 다음에는 특이하게도 크기별로 책을 다시 정리한다. 대개 책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책 크기를 기준으로 정리를 하는 사람이 드문데 임영욱씨는 크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먼저 가장 큰 책은 책장 양쪽 가장자리에 놓고 가운데로 올수록 작고 가벼운 책을 둔다. 책장 가장 아래는 전공서적처럼 크고 무거운 책 자리다. 이것은 그가 오랫동안 경험을 통해서 터득한 것이다. 늘 써오던 책장이 원목처럼 단단한 것이 아니라 싸구려 MDF 같은 재질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게 선반이 책 무게에 못 이겨 휘는 것을 어느 정도 예방한다.

판소리 및 전통문화와 관련한 책은 따로 모아 두었다. 환경과 사회학,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책도 보인다.
몇 해 전부터 임영욱씨는 여성단체인 ‘여성의 전화’에서 하는 페미니즘 책 읽기 모임에 나간다. 작년에 <페미니즘: 주변에서 중심으로>(벨 훅스 지음·모티브북·2010년)를 읽었고, 올해는 <캘리번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지음·갈무리·2011년)를 읽는다. 벨 훅스(Bell Hooks)는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모티브북· 2008년)라는 책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꽤 널리 알려진 운동가다. <캘리번과 마녀>는 언뜻 보기에 중세시대 ‘마녀 사냥’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마녀 사냥이라는 종교적 폭력행위를 통해 사람들이 어떻게 여성의 신체를 노예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 스며 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모든 소수자에 대한 지금 우리 사회의 시각도 비판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해서 임영욱씨는 꽤 이상한 얘기를 꺼냈다. “대형서점이나 도서관 같은, 책이 많은 곳에 가면 꼭 배가 아파요. 그래서 그런 곳에 가서는 느긋하게 책을 보기 힘들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전혀 알 길이 없다! 나는 그런 말을 처음 듣는다. 책 좋아하는 사람이 책 많은 곳에 가면 오히려 아팠던 것도 나아야 할 판인데, 배가 아프다니 말이다. 임영욱씨 얘기를 들어보니까 실제로 그런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자기도 처음엔 무슨 병이라도 걸린 줄 알고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봤더니 의외로 비슷한 증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더라는 거다.

임영욱씨가 최근에 읽는 책들을 따로 책장에 정리해 놓았다. 그가 하는 방식대로 양쪽 끝에는 큰 책을 두고 가운데는 작고 가벼운 책을 놓았다.
이상한 일이다. 책 많은 곳에 가면 배가 아프고 거길 빠져 나오면 또 씻은 듯이 통증이 사라진다니. 이 말을 들은 임영욱씨의 여자 친구는 책 냄새 속에 복통을 일으키는 어떤 성분이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좀 이상한 의견 같기도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그래도 가장 믿음이 가는 말이다. 임영욱씨는 누구라도 이런 증상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으면 자기에게 꼭 말해달라고 내게 부탁을 했다.
조만간 임영욱씨는 이순신에 대한 공연 대본을 써야 할 일이 있어서 책을 구해 읽으려고 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역사 쪽에 너무 지식이 얕아서 걱정이 된다. 게다가 이순신이라고 하면 이제 진부하다고 느껴질 만큼 여러 곳에서 다룬 소재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좀 더 기발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지 고민이다. 그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는 건 역시 책이다.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책은 그에게 세상을 보는 눈과 마음을 열어줬다. 책만큼 귀한 친구가 없고 그만한 스승을 찾기 힘들다. 임영욱씨는 오늘도 인터뷰를 마친 다음, 동네에서 점심을 먹고 합정동 어느 골목 지하에 있는 판소리 연습실로 갈 것이다.
글·사진 윤성근<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