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호가 만난사람]이정수 이진아기념도서관장 “책을 통해 지역을 변화시키는 길 모색”

공공도서관의 모범 사례 만드는 이정수 이진아기념도서관장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한국 현대사의 아픈 과거가 응축돼 있는 장소 가운데 하나다. 일제 강점기에는 유관순 열사 등 독립투사의 목숨을 거두고, 군부독재 시기에는 수많은 민주인사를 가둔 서대문형무소(뒤에 교도소, 구치소로 개칭), 지금은 ‘독립공원’으로 단장돼 있는 곳이다.

옛 형무소 옥사였던 우중충한 붉은 벽돌 건물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전혀 다른 분위기의 또다른 붉은 벽돌 건물이 서 있다. 서대문구립 이진아기념도서관이다. 사연을 모르는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이진아가 누구지?

개인 이름을 딴 공공건물은 이 도서관이 국내 처음이라고 한다. 미국 어학연수 중이던 이진아씨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아버지 이상철씨(현진어패럴 대표)가 책을 좋아하던 딸을 기려 50억원을 기부해 이 도서관을 지었다. 딸에 대한 애틋한 부정(父情)이 승화된 이 도서관을 사람들은 ‘가장 멋진 이름의 건물’로 부른다. 일본 여행 책에 ‘서울에 가면 꼭 봐야 하는 건물’로 소개될 정도로 건축미도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동호가 만난사람]이정수 이진아기념도서관장 “책을 통해 지역을 변화시키는 길 모색”

이 도서관을 찾은 까닭은 건물의 멋진 이름과 외양 때문만이 아니다. 올해는 정부가 지정한 ‘국민 독서의 해’다. 지난해 말 ‘작은도서관진흥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최근 근사한 도서관 건물도 많이 들어섰다. 문제는 내용이다.

문헌정보학계 인사의 말을 빌리면 우리나라 도서관은 ‘사서 없는 도서관’ ‘책 없는 도서관’으로 유명하다. 건물만 번듯하게 지어놓았을 뿐 전문인력 배치라든가 도서구입 예산배정 등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그러다 보니 도서관으로서 원래 기능은 형해화하고 독서실·공부방·커뮤니티센터 구실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진아기념도서관을 찾은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 도서관은 2005년 개관했다. 처음부터 기본에 충실했다. 독서실 중심이 아니라 정보제공, 독서활동, 문화활동, 평생교육이라는 도서관 본연의 기능에 주력했다. 공모를 통해 건물을 짓고 관장도 전문직 사서를 뽑았다. 운영 주체인 서대문구청도, 위탁운영기관인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도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고 운영에 간섭하지 않았다. 이진아기념도서관에는 ‘이진아’도 없다. 기증자 또한 운영에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 결과 상복이 터졌다. 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에서 실시하는 전국 도서관 운영평가에서 3년 연속 우수도서관으로 선정됐다. 2009년 국무총리상,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에 이어 지난해 특별상을 수상했다. 특별상은 대통령상이나 국무총리상을 받으면 만 2년까지는 다시 못 받는다는 규정 때문에 ‘특별히’ 주어진 것이다. 이밖에도 서울시장상 3회, 국립중앙도서관장상 2회 등 주요 상을 휩쓸었다. 구립도서관으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가장 멋진 이름의 건물’이라는 이진아기념도서관을 이렇게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바꾸고 있는 사람은 개관 이래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이정수 관장이다. 문헌정보학을 전공하고 사서직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이상적인 도서관’은 꿈일 것이다. 지난 2월 1일 이진아기념도서관 4층 명예관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기자에게 “여러 가지로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이름부터 특이하고 건물도 참 아름답습니다.
“아버지가 딸에 대한 사랑으로 지은 도서관이잖아요. 말하자면 형무소 역사관과 이곳이 상당히 가슴 아픈 곳이라는 게 공통점인데, 그 의미가 서로 연결돼 있어요. 형무소 역사관은 과거, 도서관은 미래를 상징하는 것이죠. 같은 빨간 벽돌이지만 도서관은 창을 많이 넣어서 밖으로 향하는 콘셉트로 간 거예요. 자연히 운영도 그렇게 하게 되더라고요. 지역사회와 접촉하면서 커뮤니티 같은 걸 많이 만들게 되죠.”

이진아기념도서관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 기부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최근 재벌 총수의 사재 출연과는 다른 감동을 주는 기부다. ‘도서관 기부’는 우리나라에서는 낯설지만 외국에서는 흔하다. 영어권 국가에 2600개 이상의 도서관을 세워 기증한 미국 철강왕 엔드루 카네기가 대표적이다. 미국 최대의 도서관인 뉴욕공공도서관도 기부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는 개인 기부로 만들어진 도서관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개인 기부로 만들어진 구립도서관은 아마 저희가 처음일 거예요. 카네기재단의 기부 방식이 저희하고 비슷해요. 지자체가 땅을 대고 기부자가 건물을 지으면 지자체가 운영을 하는 시스템이죠. 저희가 기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기부문화, 이런 데 신경을 많이 써요.”

기부는 또다른 기부를 낳는다. 도서관을 찾는 주민은 기부자의 숭고한 뜻에 감동을 받아 작지만 뜻 있는 기부를 하려 한다. 거기에는 물질적 기부뿐 아니라 활동적 기부도 포함된다.

“지난해 어떤 분이 아이 첫돌 잔치를 안 하고 100만원을 저희 도서관에 기부했어요. 그걸로 책을 150권가량 샀어요. 그 책에는 아이 이름과 누구 기증 도서라는 스티커를 붙이죠. 매년 한 번씩 꼬박꼬박 기부하는 분도 계시고요. 밖에 서 있는 이동도서관 차량도 기부한 돈으로 산 거예요.”

도서관은 과거의 지식과 문화를 계승하고 미래를 꿈꾸는 공간이다. 도서관 기부는 도서관에서 꿈을 이룬 이들의 보답과 답례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뉴욕공공도서관의 ‘드윗 월리스 정기간행물실’은 거기서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구상하여 창간한 월리스가 아이디어의 원천인 도서관에 감사의 표시로 거액을 기부한 징표다.

어떤 인연으로 이곳 도서관장직을 맡게 됐습니까.
“제가 사실은 서대문구 출신이에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고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죠. 서대문구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공고를 우연히 봤는데, 마치 저를 위한 것인 양 착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이 관장은 덕성여대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경제신문 조사부에 근무하다 대림대·덕성여대·숙명여대 등에서 문헌정보학을 강의했다.

서대문구립 도서관은 서대문구민에게만 서비스합니까.
“아니에요. 서울시민이나 서울시에서 직장 또는 대학에 다니는 분은 다 대상이에요. 사실은 다 한다고 봐야 돼요. 경기도 고양시에서 온 분도 (규정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이용하시게 합니다.”

이진아기념도서관이 도서관 운영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 이유가 있을 텐데요.
“저는 공공도서관을 모르는 상태에서 관장을 맡아가지고 조금 이상적인 도서관 운영을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고민을 많이 했죠. 지역 주민과 상호 교류하고 책을 통해 지역을 변화시키는 길이 없을까 하고 말이죠. 결국 내가 성장하고 지역이 발전하는 게 도서관 운영의 힘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래서 커뮤니티 활동을 아주 많이 하려고 노력했거든요.”

그게 효과가 있었습니까.
“사교육 없이 영어 공부시키는 엄마 모임, 초등학생 학교 가는 길 교통안전 지도, 이런 걸 하니까 처음에는 ‘도서관에서 왜 이런 걸 하지?’라는 반응이었죠. 굳이 도서관에서 안 해도 되니까 오히려 공부방 만들어달라는 민원이 많이 들어왔어요. 거기에 굴하지 않고 도서관의 원래 기능, 다시 말하면 기본적인 생활정보부터 심화된 학술정보까지 내가 모르는 걸 알아보는 역할에 주력한 거죠. 특히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분들을 설득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도서관 평가의 지표 가운데 예산, 인력, 사서 숫자 등은 불가항력의 요소다. 그는 자신이 발로 뛰어서 할 수 있는 일을 놓지 않았다. 지역사회 협력사업, 커뮤니티 사업, 소외계층에 대한 프로그램 등 비예산·저예산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주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예를 들면 노인을 위한 컴퓨터 강좌는 어느 도서관이나 복지관이나 다 해요. 저희는 휴대폰 사용법을 가르쳐드렸어요. 노인이 스마트폰 사용하기가 어렵잖아요. 결혼이주여성을 도서관에서 훈련시켜 일자리를 제공하는 일도 하고요. 이런 특화된 사업이 반응이 큰 거죠.”

상을 받으면 거기에 따르는 보상이 있습니까.
“사실 처음에는 상을 받아도 상 받았네, 이랬는데 도서관 운영평가에서 3년 연속으로 받으니까… 그런 경우가 잘 없거든요. 그러니까 구청장님께서 열심히 한다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한 마디 해주시고 예산안이 올라가도 깎지 않더라고요. 제가 하는 얘기에 신뢰를 가져주고요. 그런 게 얻는 것들이죠.”
이진아기념도서관의 1년 예산은 12억원 정도다. 지난해 이용자는 약 57만명이다. 전체 숫자의 절반, 심지어 3분의 2가 일반열람실 이용자인 대부분의 다른 도서관과는 다른 ‘순수 이용자’다. 장서는 8만3000여권.

요즘 구립도서관이 건물만 그럴 듯하고 내용과 운영은 부실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진아기념도서관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서대문구 인구가 약 33만명이에요. 저희 도서관 규모로 봐서는 장서가 9만9000권 정도여야 해요. 그러면 서대문시립도서관이 한 20만권 되니까 저희하고 해서 30만권 정도 돼서 인구 한 명당 한 권씩 되잖아요. 현재로서는 저희 장서가 취약한데 그걸 극복하기 위한 것이 작은도서관과의 네트워크 구축이라고 생각해요. 작은도서관을 분관화하고 상호대출을 하는 것이죠.”

이진아기념도서관은 2개의 분관을 운영하고 있다. 남가좌새롬어린이도서관과 홍은도담도서관이다. 그는 본관과 분관, 그리고 서대문구에 있는 장서 1만권 이상인 4개의 작은도서관에 사서를 배치하도록 만들었다. 공립도서관조차 한 관당 사서 수가 1명도 안 되는 현실에서 놀라운 성과라고 할 만하다.
“역량 있는 사서를 배치해야 책을 보는 관점이나 책을 통해서 지역사회를 발전시키려는 의지가 반영돼 도서관이 잘 운영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도서관법에 명시하고 있는 사서 인원을 제대로 배치하는 공공도서관이 거의 없는 실정이에요. 도서관은 늘어나는데 사서직렬 정원은 한계가 있으니까 처음에는 나누어서 배치하다가 결국 민간위탁을 하게 되는 거죠.”

전체적으로 보면 도서관이 안고 있는 문제도 구조적인 측면이 있군요.
“요즘 도서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우려를 하는 것이 도서관 정책은 확장 추세에 있고 발전적인데 하나하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외형적인 발전만 있고, 그 자체도 바람직하게 가지 못한다는 거죠. 2006년 이후에 도서관 수는 굉장히 늘었지만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규모가 되지 않는 데다 재정상태도 열악해요. 그러다 보니 사서도 안 뽑거나 비정규직으로 뽑고 책도 안 사주고 우리 동네 도서관 몇 개 있다고 홍보하는 거예요. 도서관 업무라는 게 바로바로 실적이 나오는 게 아닌데 자치단체마다 실적을 요구하고 안 되면 민간위탁을 하고 그래도 또 안 되니까 다시 운영 주체를 바꾸고…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죠.”

신동호가 만난사람

앞으로 도서관 운영과 관련해서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
“제가 작은도서관에 사서를 배치하는 것까지는 했지만 완전히 저희 분관으로 만들지는 못했거든요. 그런 방향에 대해 공무원이든 누구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씀을 드리고 있어요. 영향력을 가진 분이 한 마디 해주시면 가능한 문제거든요. 주민문고(작은 도서관) 8군데와 상호대차가 가능하도록 하고 싶어요. 예를 들면 연희동 사는 사람이 동사무소 옆에 있는 문고에 갔는데 원하는 책이 거기에 없고 저희 도서관에 있어요. 그럴 때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면 여기 오지 않아도 저희가 연희동 문고에 갖다놓고, 그분이 거기서 빌려가고 반납할 수 있게 하는 거예요. 그런 통합시스템을 만드는 게 장기적인 과제예요. 그렇게 되면 공립 작은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하나의 모범사례를 만들어서 다른 자치단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