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고 시각적인 현대판 일기로 재탄생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열하일기 1, 2, 3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돌베개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돌베개

저자가 생각하는 <열하일기>의 진정한 주제인 “있었던 세계, 그리고 있는 세계에 대한 비판과 통찰을 통해서 있어야 할 세계를 전망하고 모색”하는 작업에 동참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열하일기>를 제대로 읽은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연암이 길을 갔던 만주벌판에서 시린 바람 불어오는 이때야말로 <열하일기> 읽기에 대한 부채 의식을 던져버릴 좋은 기회다. 좋은 번역본이 나와서다. 도서출판 돌베개는 자랑스럽게도 ‘새 번역 완역 결정판’이라 이름 붙여 역자 김혈조 교수의 “얼굴을 다소 간지럽게 만들”었다. <열하일기>의 번역본은 여럿 있었다. 1948년에 시작된 최초의 전문 번역인 김성칠 선생본, 북한 국립출판사의 리상호 선생본, 이가원 선생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나온 민족문화문고본, 윤재영 선생의 박영문고본, 가장 최근에 출간된 고미숙 선생 등의 편역본 등이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또 다른 번역이 필요했다.

<열하일기> 내용 가운데 심양의 한 골동품점에서 중국의 젊은이들과 밤을 새워 필담한 내용을 기록한 ‘속재필담’ 부분이 있다. 자리를 함께한 중국인 가운데 비치라는 사람은 나이는 35세인데 아들을 8명이나 두었다. 짓궂은 연암이 물었다. “자제 여덟 명은 모두 한 어머니에게서 나서 젖을 먹였는가요.” 비치는 웃음만 지으니 친구인 배관이 나섰다. “두 분 작은 마나님이 더 있는데, 좌우에서 끼고 도와드렸답니다. 나는 여덟 아들이 부러운 게 아니라 한 남자가 세 여자를 거느렸다는 게 더 탐납니다(還有兩小夫人 左右夾助 吾不羨他八龍 慕渠一姦).” 온 방안이 한바탕 웃었다. 마지막 부분 ‘慕渠一姦’(모거일간)이 문제였다. 직역하면 ‘한 번 간통하는 것이 그립다’라는 말이 된다. 

지금까지 번역자들은 고심 끝에 이 부분을 순화시켜 “작은 마누라나 하룻밤 빌려 쓰면 그만이겠소” 식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김 교수가 보기에 이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친구 마누라를 빌려 달라고 하면 주먹다짐을 할 일이지 한바탕 웃을 일이 아니지 않은가. 김 교수도 처음엔 “그의 한 번 간통이 부럽습니다”라고 직역했다. 번역해 놓고도 이는 영 찜찜한 일이었다. 김 교수의 고백이다. “윤문을 할 때도 어찌 하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갔다가 출판 교정을 볼 때에 이르러서야 이런 번역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분명 오역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원문을 확인하며 대조해 보았다. 그리고 ‘姦’(간)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어떤 영감이 스치고 지났다.” 연암만이 가능했던 수사 기교임을 알아챈 것이다. 연암은 글자의 상형적 모습을 이용한 파(破)자식 표현으로 원문을 쓴 것이다. 이는 연암체의 한 특징이었다. 여기에서 기존 번역과 새 번역의 길이 갈라졌다. 연암체의 특징을 깨달은 순간 본문의 ‘姦’(간)이 한자의 본래 뜻 ‘간통’보다는 ‘여자 셋’이라는 파자로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김 교수는 번역을 마무리하기 위해 지난해 가을 연구년이라는 유배를 선택했다. 중국 산동성으로 가 1년을 머물렀다. 그곳에서 다시 중국의 현장과 풍속, 영인본 등 각종 전고를 확인했다. 사진을 찍고 자료를 수집했다. 그래서 재미있고 시각적인 현대판 일기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하여 김 교수가 생각하는 <열하일기>의 진정한 주제인 “있었던 세계, 그리고 있는 세계에 대한 비판과 통찰을 통해서 있어야 할 세계를 전망하고 모색”하는 작업에 동참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기껏 고전을 번역해 출간해 봐야 공공도서관에서 1000권조차 구입해 주지 못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2009년에는 경제위기를 핑계로 예산을 조기집행하느라 공공도서관의 1년치 도서구입비를 상반기에 모두 집행했다. 운이 없게도(?) 이 책은 9월 말에야 출간됐다. 돈도 안 되는 <열하일기>와 같은 고전을 새롭게 번역하고 출간하는 일은 고마운 일이다. 우리는 독서로써 값해야 한다.

최재천<변호사> cjc4u@naver.com

요즘 이 책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