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 40주년 프랑스 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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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년대 한국 영화키드의 산실

프랑스문화원 살 드 르누아르 앞에서 영화상영 시간을 기다리던 젊은이들(위)과 1977년 중앙일보에 보도된 살 드 르누아르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의 모습. <프랑스문화원 제공>

프랑스문화원 살 드 르누아르 앞에서 영화상영 시간을 기다리던 젊은이들(위)과 1977년 중앙일보에 보도된 살 드 르누아르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의 모습. <프랑스문화원 제공>

올해는 프랑스문화원이 한국에 문을 연 지 꼭 40년이 되는 해다. 1968년 한국과 프랑스는 한·불 문화협정을 체결하고 이를 계기로 같은해 서울에 프랑스문화원을, 1980년 파리에 한국문화원을 설립했다.

프랑스문화원이 서울에 처음 둥지를 튼 곳은 서울 종로구 적선동이다. 하지만 프랑스문화원이 숱한 한국 영화인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며 예술적 요람으로 꽃을 피운 것은 1971년 종로구 사간동 70번지로 옮기면서다. 2001년 다시 중구 봉래동 숭례문 근처 우리빌딩 18층으로 이전했지만, 영화인들이 프랑스문화원에 대한 깊고 짙은 향수를 느끼는 것은 1970~80년대 사간동 시절이다.

한국영화, 사전검열로 만신창이
많은 영화인은 “그때 만약 프랑스문화원이 없었다면 새로운 한국 영화가 쏟아져나온 1997년부터 2006년까지의 한국 영화 부흥기는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한국 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의 상당수가 1970~80년대 프랑스문화원을 이용한 단골 멤버였기 때문이다. 영화감독 정지영·장길수·배창호·박광수·김홍준·장선우·강제규·곽재용·임순례·전수일·이명세·박찬욱·김지운, 영화제작자 안동규, 영화평론가 정성일·양윤모,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전양준,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한상준, 배우 안성기·임예진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상준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이 “현재 한국 영화계 인사의 절반이 프랑스문화원에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그렇다면 이들 영화인은 저마다 프랑스문화원과 관련해 어떤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1960년대 한국 영화는 한 해 영화 관객 수가 가장 많을 땐 1억50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1500편이 훨씬 넘는 한국 영화가 상영됐다. 그러나 이 같은 양적 풍요 속에서도 뭔가 공허했다. 문예영화 아니면 반공영화 혹은 스토리가 뻔한 신파 멜로영화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그 즈음 외국 영화는 한 해 20편 정도로 제한됐고 수입 허가가 난 것도 대개 미국 상업영화였다.

사간동 시절의 프랑스문화원 전경.

사간동 시절의 프랑스문화원 전경.

한국 최초의 영화법은 1962년 1월 법률 제995호였는데 이 법이 영화 내용에 제동을 거는 장치로 작용했다. 71개의 영화사가 16개로 통폐합됐고 영화사 설립도 등록제로 바뀌었다. 1971년엔 외환 보유라는 명분을 내세워 외화 수입을 영화사에 연간 한 편을 허가했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반공영화, 새마을영화, 문예영화를 만들면 추가로 외화 한 편의 수입권을 줬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 대한 사전검열로 한국 영화는 만신창이가 됐다. 비디오도 없던 시절이었다. 영화를 보려면 정권이 허락한 영화를 극장에 가서 보거나 TV ‘토요명화’ ‘주말의 명화’ ‘명화극장’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 1970년대와 8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암흑기였다.

이때 프랑스문화원의 개원은 새로운 영화, 새로운 세계에 갈증을 느끼던 이들에게 오아시스와 같았다. 이곳에서는 한국에서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영화(물론 프랑스 영화였고, 불어 대사에 영어 자막이 붙어 있었다)가 가위질 한 번 당하지 않은 채 온전히 관객에게 공개됐기 때문이다. 야릇한 애정신이 나오는 영화도 무삭제로 상영했다. 일종의 문화 특구 또는 해방구였던 셈이다.

살 드 르누아르는 사라졌지만 프랑스문화원은 2006년부터 서울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에서 매주 한 편씩 프랑스영화를 선정해 상영하는 ‘씨네프랑스’ 행사를 열고 있다. <프랑스문화원 제공>

살 드 르누아르는 사라졌지만 프랑스문화원은 2006년부터 서울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에서 매주 한 편씩 프랑스영화를 선정해 상영하는 ‘씨네프랑스’ 행사를 열고 있다. <프랑스문화원 제공>

문화원이 문을 연 첫해 고려대 불문과 67학번인 정지영(62·영화감독)은 교내 영화동아리 ‘영상회’ 일원으로 프랑스문화원에서 영화 ‘영웅적인 축제’와 ‘히로시마 내사랑’을 빌려와 교내 시청각 교육실에서 상영회를 열였다. 정 감독은 “당시 학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면서 “영어 자막이 있는 필름이어서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화 전문가를 초빙해 영화 관람 후 설명회도 열었다”고 회고했다. 정 감독이 본격적으로 프랑스문화원을 드나든 것은 사회에 나와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고 조감독 생활을 하면서다. 당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배용균 감독과 사간동으로 터를 옮긴 문화원을 자주 드나들던 그는 그곳에서 ‘숲과 늪’의 홍파 감독도 만났다.

영화관람 위해 인사동까지 줄서
사간동 프랑스문화원에는 지하영사실 ‘살 드 르누아르(르누아르의 방)’가 있었다.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이라는 찬사가 따라다니는 프랑스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의 이름을 빌린 시사실이다. 사람들이 몰리면서 170석짜리 작은 공간을 하루 최대 6회까지 돌려가며 가동했지만 미처 들어가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인파가 넘쳐났다. 이른 아침부터 경복궁 동문 국군병원부터 인사동 로터리까지 줄을 길게 늘어선 장면이 매일 반복됐다. 데모가 일어난 줄 알고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정지영 감독(왼쪽) <경향신문>, 정성일 영화평론가. <시네마디지털 서울>

정지영 감독(왼쪽) <경향신문>, 정성일 영화평론가. <시네마디지털 서울>

영화평론가 정성일(49)씨도 프랑스문화원 키드다. 중학교 3학년인 정성일은 우연히 신문에서 ‘금지된 장난’이라는 영화를 프랑스문화원에서 상영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당시 라디오에서 영화평론가 고(故) 정영일씨는 영화 ‘금지된 장난’과 ‘길’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영화로 자주 소개했다. 그렇지 않아도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극장에 다니며 홍콩 쇼브러더스 마니아였던 정성일은 이 영화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프랑스문화원에 가면 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날 ‘금지된 장난’과 같이 상영한 ‘기관총 부대’라는 제목의 영화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정성일씨는 “장뤼크 고다르의 영화는 태어나서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방식의 영화였고, 이때부터 ‘도대체 영화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일까’라는 질문을 품은 채 프랑스문화원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종전까지만 해도 영화는 줄거리나 액션을 보고 배우 이름을 파악하는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문화원에서 본 영화들은 뭔가 달랐다. 주연배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다거나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를 한다거나 연속적인 편집을 거절하고 몽타주 방식으로 화면을 연결하는 등 이전 한국 영화나 홍콩 영화, 미국 상업영화와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당시의 충격을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에 비유했다.

매진으로 영화를 볼 수 없을 땐 인근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으며 죽치고 앉아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 앞의 영화를 보고 자리를 뜨는 사람이 있으면 재빨리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당시 그 중국집에는 그와 같은 목적으로 자장면을 먹는 이들이 꽤여럿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 또 하나. 누가 봐도 중학생일 게 뻔한 그가 문화원에서 성인영화를 상영하는 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당시 영화표를 팔던(장내 정리비 명목으로 20~50원의 관람료를 받았다) 문화원 직원 양미을씨에게 돈을 내며 물었다. “저도 이 영화 봐도 되나요?”라고. 그러자 양미을씨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표를 내주면서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서 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라고. 우문현답(愚問賢答)이었던 셈이다.

현상준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경향신문>

현상준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경향신문>

한상준(49)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이 프랑스문화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가 서울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4년이다. 정성일씨와 마찬가지로 라디오에 출연한 고(故) 정영일씨의 소개를 통해 프랑스문화원이라는 곳에서 영화를 상영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가 그곳에서 처음 본 영화는 이브 몽땅 주연의 ‘공포의 보수’. 당시 시사실에 대한 첫인상을 그는 “마치 영화의 보물 장소를 발견한 느낌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는 보충수업을 빼먹고 매일 한달음에 문화원에 달려갔다. 영화를 보기 위해 불어를 공부했을 정도다. 프랑스 누벨바그의 대표 감독인 트뤼포영화도 그곳에서 섭렵했다. 이후 재수를 거쳐 성균관대 신문방송과에 입학해서도 프랑스문화원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었다. 당시 문화원에서는 매주 목요일 시사가 끝난 저녁시간 영화평론가 정용탁(현 한양대 교수)씨와 고(故) 안병섭(전 서울예전 교수)씨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씨네클럽’이 있었다. 영화를 보고 해당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미국 감독 오선 웰스의 문제작 ‘시민케인’ 필름을 빌려와 프랑스문화원에서 다같이 보고 공부하기도 했다. 한상준 위원장은 “시중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영화들을 두루 보고 공부하면서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우게 해줬다는 점과 훗날 한국 영화를 이끌게 될 영화인재들과 인연을 맺게 해줬다는 점에서 프랑스문화원은 내게 몹시 각별한 공간”이라고 말했다.

정지영·장길수·배창호 감독 등 인연

김홍준 감독(왼쪽), 박광수 감독 <경향신문>

김홍준 감독(왼쪽), 박광수 감독 <경향신문>

고등학교 때 문화원에 발을 들여놓기는 김홍준(52·충무로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감독도 마찬가지다. 1972년 경기고 1학년생으로 모범생이던 김홍준은 제2외국어로 불어를 선택한 상황에서 혹여 학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 프랑스문화원을 찾았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서 처음 접한 영화는 장뤼크 고다르 감독의 ‘기관총 부대’였다. 영화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뭔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점차 이곳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에 흥미가 생겼다. 시중에 볼 수 없는 야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소년을 매혹시켰다. 김 감독은 “프랑스문화원은 당시 학교와 집밖에 모르던 나의 유일한 일탈의 장소로, 소년시절의 소중한 추억”이라고 전했다.

박광수 감독과 곽재용 감독은 1980년대에 프랑스문화원과 인연을 맺었다. 1980년 서울대 영화동아리 ‘얄라셩’ 멤버였던 박광수(53)는 얄라셩에서 만든 영화를 프랑스문화원에서 후반 작업을 하기도 하고 상영회를 열기도 했다. 박 감독은 “당시 프랑스문화원에서 영사기사로 일한 박건섭(현 임권택예술영화학교 학장)씨의 도움으로 문화원이 문을 닫은 후 얄랴셩이 만든 단편영화를 문화원에서 사운드믹싱과 같은 후반 작업을 했다”고 회고했다.

대학마다 영화제 열기도

곽재용 감독 <경향신문>

곽재용 감독 <경향신문>

곽재용(49) 감독은 감독 데뷔를 프랑스문화원에서 했다. 1984년 자신이 연출한 8㎜영화 ‘변신’을 프랑스문화원에서 상영한 것이 계기가 돼 본격적으로 영화감독의 길에 나섰다. 경희대 물리학과 학생으로 친구들과 단편영화를 만들던 그는 프랑스문화원에서 학생들이 만든 단편영화를 상영해준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찾아갔다. 그의 영화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이후 연출한 ‘무제’ ‘선생님 그리기’도 그곳에서 상영했다. 곽 감독은 “프랑스문화원은 지금의 독립영화들의 모태가 된 곳으로, 당시 프랑스문화원 출신이 주축이 돼 대학마다 영화제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들이 모여 국립극장에서 영화제를 열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곽 감독은 또 “당시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빵 하나로 끼니를 때우며 살 드 르누아르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버티며 영화에 탐닉했는데 당시 프랑스문화원이 없었다면 내가 영화감독이 안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빛낸 수많은 한국 영화인을 길러낸 자궁이자 탯줄이 된 프랑스문화원의 살 드 르누아르는 그러나 국내에 비디오가 출시되고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진 198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급기야 사간동을 떠나 2001년 지금의 봉래동으로 옮기면서 영사실 자체를 없애야 했다. 더 이상 영화를 보러 이곳을 찾는 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살 드 르누아르에서 웃고 울며 보던 필름의 잔영은 차곡차곡 쌓여 오늘날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새로운 한국 영화의 탄생과 부흥에 밑거름이 됐다. 때문에 살 드 르누아르는 숱한 영화인의 기억 속에, 가슴 속에 그리고 한국영화사에 영롱히 살아 있다.

인터뷰|프랑스문화원 35년 지킴이 최재원씨
“윤정희·문희씨도 가끔 왔어요”

<김석구 기자>

<김석구 기자>

“1970~80년대 영화를 보려고 문화원을 찾은 사람이 문화원 앞부터 삼청동 초입의 동십자각을 돌아 한국일보 건너편까지 두 줄로 늘어서 있었어요. 매일 그랬죠. 하루 평균 1000여 명의 사람이 몰렸으니까요. ‘금지된 장난’을 상영할 때였던가, 한번은 경찰 기마병까지 출동했어요. 데모라도 하는 줄 알았던 거예요.”

1973년 문화원에 들어온 이래 35년간 문화원 살림을 돌봐온 최재원(62)씨는 살 드 르누아르의 흥망성쇠를 지척에서 목격한 주인공이다. 당시 그는 상영영화에 대한 홍보책자를 만드는 일과 함께 영화를 보러 오는 인파를 통제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통제는 쉽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서는 이들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원래 관람권을 문화원 1층 도서실 카운터에서 배포하게 돼 있는데 이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서로 밀고 당기다 커다란 책장이 넘어진 일도 있었다. 늘 사고가 날까봐 마음을 졸여야 했고 하루하루가 그에겐 전쟁터와 같았다.

“처음엔 오후 2시와 4시 두 차례 영화를 상영하다 사람들이 몰리면서 상영 횟수를 하루 여섯 차례까지 늘린 거예요. 당시엔 현역 영화감독과 배우들도 문화원을 찾아 영화를 봤어요. 윤정희, 문희씨도 가끔 와서 봤고 청춘스타였던 임예진씨는 책가방을 문화원 2층 제 사무실에 던져놓고 영화를 관람했지요. 얼굴이 알려진 영화배우들은 혹시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뒷문으로 들어왔어요. 또 시사실에 불이 다 꺼진 후 자리에 앉거나 영사실에서 헤드폰을 착용한 채 따로 영화를 봤지요.”

당시 학생과 성인의 관람료는 각각 20원, 30원하다가 30원, 50원이 됐다. 장내 정리비 명목으로 받은 돈이다. 크게 부담이 되는 돈은 아니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내가 한창 문화원을 드나들 때 피카디리 극장의 학생 입장료가 250원이었기 때문에 당시 문화원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낸 돈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살 드 르누아르의 열기가 뜨겁자, 문화원은 3개월마다 한 번씩 프랑스에서 35㎜영화를 별도로 들여와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에서 상영했다. 한국에서의 폭발적 반응이 프랑스에도 고스란히 전달됐던 것이다.

하지만 사간동 시절 살 드 르누아르에서 상영했던 1000여 편에 달하는 수많은 영화 필름과 각종 영화책자는 지금의 봉래동으로 이사하면서 모두 버려야 했다. 지금의 자리에 트럭 두 대분에 달하는 영화 자료를 보관할 공간이 없었던 탓이다. 최씨는 이것이 못내 아쉬운 눈치다. 반평생 이상을 프랑스문화원에서 보낸 그는 “사간동 살 르누와르 시절은 몸은 고돼도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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