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독감바이러스 부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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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공학적 상상력이 돋보였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쥬라기공원’을 떠올려 보자.

과학자들은 조류인플루엔자(AI) 백신을 만드는 데 스페인독감바이러스가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사진은 최근 조류 인플루엔자가 돌고 있는 동유럽의 벨로루시.

과학자들은 조류인플루엔자(AI) 백신을 만드는 데 스페인독감바이러스가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사진은 최근 조류 인플루엔자가 돌고 있는 동유럽의 벨로루시.

‘호박’이라는 광물 안에 중생대 시절의 모기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 모기는 공룡의 피를 빨았고 모기 안에는 공룡의 DNA가 들어 있다. 과학자들은 공룡의 DNA를 분리한 다음 과거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을 되살려내는 데 성공한다. 물론 이 시나리오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시나리오가 바이러스의 세계에서는 실제로 가능하다.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최근 알래스카의 얼어있는 땅(영구동토층)에 묻혀 있던 한 여성의 시신에서 바이러스 유전자를 분리해 소생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쥬라기공원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알래스카의 영구동토층은 호박, 사람은 모기, 복원에 성공한 바이러스는 바로 공룡에 해당하는 셈이다.

과학자들은 스페인독감바이러스가 최근 몇 년 사이에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조류인플루엔자(AI) 바이러스와 비슷하기 때문에 조류인플루엔자 백신을 만드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바이러스, 어떻게 만드나 스페인독감바이러스는 1918년 스페인에서 발생해 전 세계로 전염되면서 약 5000만 명을 몰살시킨 전염병이다. 인류 역사가 기록하는 독감으로는 가장 사망자가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독감에 걸린 희생자가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그 희생자들과 함께 지구상에서 사라진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분자생물학이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페인독감바이러스는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 공룡처럼 멸종해버렸다.

[과학이야기]스페인독감바이러스 부활하다

그러나 21세기 현대 과학은 멸종된 바이러스를 다시 복원해냈다. 바이러스 복원은 아주 쉽지도, 아주 어렵지도 않다고 한다. 이미 일 년여 전 미군질병연구소의 제프리 타우벤버거(Jeffry Taubenburger)가 파라핀 조직에 보관되어 있던 스페인독감 사망자의 신체 조직에서 바이러스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2005년 10월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해당 논문을 발표할 당시 과학자들은 “오늘이 과학계의 ‘빅 데이(Big Day)’”라며 흥분했다.

바이러스 복원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그림 참조). 스페인독감바이러스는 8개의 조각으로 구성돼 있다. 과학자들은 이 바이러스의 유전자 정보를 바탕으로 스페인독감바이러스의 유전자를 합성해낸다. 이후 이를 ‘플라스미드’에 끼워 넣는다. 플라스미드는 고무줄처럼 동그랗게 이어진 DNA들. 다른 세포에 끼어들어가 바이러스를 증식시키는 역할을 한다. 플라스미드에 의해 세포 안으로 운반된 스페인독감바이러스 유전자들은 스스로 단백질 껍질을 만들 수 있다. 결국 수백, 수억 개의 스페인독감바이러스로 증식된다.

스페인독감바이러스의 전자현미경사진. 최근 과학자들은 멸종된 스페인독감바이러스를 복원했다.

스페인독감바이러스의 전자현미경사진. 최근 과학자들은 멸종된 스페인독감바이러스를 복원했다.

공룡 복원과 어떻게 다르나 모기의 피에서 공룡의 유전자를 뽑아내는 것은 어렵지만 사람의 조직에서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뽑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보다 손쉽다. 첫 번째, 바이러스는 고등동물에 비해 유전자 수가 극히 작기 때문이다. 고등동물인 공룡은 DNA 염기가 수억 개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되지만 바이러스는 많아봐야 수만 쌍이다. 찾아내야 할 대상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그만큼 찾기가 쉬운 셈이다.

두 번째는 이미 다른 독감바이러스가 알려져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이 바이러스의 유전자인지 구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독감바이러스의 유전자 설계도를 바탕으로 분리해낸 유전자 염기서열을 해독해 스페인독감바이러스의 염기서열을 완성할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인간의 유전자와 독감의 유전자는 구성 성분이 일부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은 DNA(핵산)이지만 독감바이러스는 RNA(리보핵산)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섞여 있다 하더라도 리보핵산으로 된 부분이 쉽게 구별된다.

스페인독감 희생자의 폐조직.

스페인독감 희생자의 폐조직.

네 번째는 바이러스의 특징 때문이다. 바이러스는 생명체 밖에서는 유전자로만 존재하다 생명체 안에 들어가야만 증식을 하는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 있다. 바이러스는 숙주 안으로 들어가 숙주의 효소들을 자기 것으로 바꿔 자신의 껍질을 만들어내고 스스로 조립된다. 반면 공룡과 같은 동물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발생과정을 스스로 거쳐야하기 때문에 인간이 이를 실험실에서 재현할 수 없다.

독감바이러스, 꼭 복원해야하나 지난 1월 18일 일본 도쿄대 의학연구소의 연구팀은 스페인독감바이러스를 원숭이에 감염시키는 실험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논문에 따르면 스페인독감바이러스에 감염된 원숭이는 하루 만에 몸이 쇠약해지고 식욕부진에 빠졌으며, 8일째에는 호흡기 상태가 악화되며 기도 전체에서 고농도로 증식한 바이러스가 검출돼 치사율 높은 폐렴에 걸린 것이 확인됐다. 또 유전자에서도 비정상적인 면역 반응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팀은 “스페인 독감을 더 분석하면 AI의 예방과 치료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다시 영화 쥬라기공원으로 돌아가 보자. 인간이 만들어낸 공룡들은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까닭에 결국 여러 사람이 공룡에 희생당하고 말았다. 인간이 만들어낸 스페인독감바이러스도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어찌 하겠는가. 바이러스 부활 연구의 대표적 비판론자로 꼽히는 미국 루트거스대학의 미생물학자 리처드 에브라이트 교수는 이에 대해 “커다란 위험부담을 안고도 바이러스 부활에 나서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일”이라며 “굳이 해야 하는 연구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은정 경향신문 과학전문기자 ejung@kyunghyang.com>

스페인독감, 조선시대 한국에서도 발병했나

3·1운동 직전인 1918년 한국에서도 스페인독감과 비슷한 독감이 발생했다고 한다. 선교사이자 수의학자인 스코필드 박사는 스페인의 의학학술지 자마(JAMA)에 ‘특별한 고찰이 필요한 한국의 유행성 독감(Pandemic Influenza i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 to its Etiology)’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에 따르면 시베리아철도를 타고 전파된 유행성 독감이 1918년 9월 한국에 첫 모습을 드러냈으며, 740만 명이 이 병에 감염돼 14만 명이 사망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독감에 걸린 사람은 열이 급작스럽게 올라 40도가 된다. 24시간이 지나 열이 정상적으로 내린 사람은 생존하지만 기관지염이나 폐렴이 동반되면 곧 죽게 되며 치사율이 매우 높았다. 많은 학교와 관공서가 문을 닫았는데 선생들이 독감에 걸려 수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 독감과 스페인독감을 비교하기 위해 보체고정, 혈청진단법, 피부시험과 같은 시험을 실시했으나 스페인독감과 같은 종류인지는 정확히 밝히지 못했다. 당시 죽은 사람의 조직이 남아 있다면 아마도 현대 과학으로 그 유사성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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