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구석 과학사](40)각기병을 연구하다 비타민을 찾아내다

오늘날 우리는 각기병이 비타민B1(티아민)의 결핍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아니, 각기병에 대한 연구가 비타민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감염병은 오랫동안 인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였다. 한 집단의 사람들이 남녀노소, 선한 이 악한 이, 건강한 이 병약한 이를 가리지 않고 줄줄이 쓰러지고 목숨을 잃는 광경은 그야말로 죽음의 신이 낫을 휘두르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옛날 사람들은 감염병이 독한 기운이나 오염된 공기 같은 것이 특정한 장소에 퍼져 일어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비타민B1 결핍증 예방과 치료에 효과적인 활성지속형 비타민 아로나민 광고. / 경향신문 자료사진

감염병의 원인이 아주 작은 다른 생명체라는 건 1880년대가 되어서야 알려졌다.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1843~1910)는 콜레라와 결핵을 일으키는 미생물을 분리해냈고, 이 병원체가 몸속에 들어가야만 병에 걸린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여주었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1822~1895)는 미생물과의 접촉을 막으면 유기물의 부패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네덜란드의 레이우엔훅(1632~1723)이 현미경을 만들고 조그만 생명체를 눈으로 본 지 200여년이 지나서, 인류는 감염병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쥐게 되었다.

일본 군대에 만연한 ‘도쿄 부자들의 병’

이 소식을 들은 전세계의 과학자들은 앞다퉈 미생물 사냥에 나섰다. 모든 감염병에는 저마다 원인이 되는 미생물이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과학계를 휩쓸었다. 그 경쟁에는 독일에 유학하여 세계 과학의 최첨단을 경험한 일본 학자들도 뛰어들었다. 기타사토 시바사부로(1853∼1931)는 코흐의 결핵균 분리 실험과 항디프테리아 혈청 연구에 함께 참여했고, 하타 사하치로(1873∼1938)는 폴 에를리히(1854∼1915)와 함께 페스트의 예방법을 연구했다. 이들은 모두 노벨상 후보로도 선정되어, 일본 과학계의 자신감을 높여주었다.

그런데 일본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기 딱 좋은 병이 나타났다. 군대에 만연한 각기(脚氣)라는 병이었다. 각기병 환자는 다리가 붓고 심하게 아프며 근육이 허약해져 걷기 어려워진다. 병이 심해지면 심장 기능이 떨어져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는 각기병이 비타민B1(티아민)의 결핍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아니, 각기병에 대한 연구가 비타민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각기병은 쌀을 주식으로 하던 사회에서는 예부터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병이었다. 다만 19세기 말 일본 과학자들이 각기병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 발병 양상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근대 이전, 민중은 흰쌀밥을 좀처럼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전체 칼로리는 모자랄지언정 비타민 부족은 겪지 않았다. 삼시세끼 흰쌀밥을 먹을 수 있었던 부자들이 오히려 다리가 붓고 힘이 없어지는 이상한 병에 걸리곤 했다. 이 때문에 각기병은 에도(도쿄의 옛 이름)의 부자들이나 걸리는 병이라 하여 ‘에도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에도병이 전국적인 문제가 된 것은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징병제를 실시하면서부터였다. 군대에 들어간 농촌 청년들은 평소에는 잘 먹지 못했던 흰쌀밥을 급식에서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흰쌀밥을 양껏 먹은 장병들이 각기병에 걸리면서 군대의 전력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일본 과학자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각기병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제시했다. 규율이 심한 집단생활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라는 정신과적 설명도 있었고, 심지어 군대 내 동성애나 지나친 자위행위가 원인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 과학계의 주류들은 집단생활에서 나타나는 병이니 각기병도 당연히 감염병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감염병을 연구하던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각기균’을 찾아내고 백신을 만들고자 했다.

심지어 연구 성과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각기병 환자의 혈액을 분석하여 각기균을 현미경으로 확인했다는 논문이 출판됐고, 각기병이 만연한 인도네시아의 실태를 조사하러 다녀온 연구팀은 ‘각기병을 일으키는 무언가’를 찾은 것 같다는 보고서를 냈다.

하지만 각기병 세균설을 믿던 과학자들의 흥분이 무색하게도 해결책은 뜻밖의 곳에서 나타났다. 해군 군의총감이었던 다카키 가네히로(1849~1920)는 장병의 식단을 바꾸면 각기병을 예방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급식을 보리밥으로 바꾸고 야채 반찬을 늘렸다. 야채를 싫어하는 젊은 장병들에게 야채를 많이 먹이기 위해 카레라이스를 급식에 넣기도 했다. 다카키는 ‘보리밥 남작’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그의 조치 덕분에 러일전쟁 당시 육군의 각기병 환자가 20여만명에 이르렀던 데 비해 해군에서는 100명에도 미치지 않았다.

일본 해군이 금요일마다 카레를 먹는 전통은 오늘날의 해상자위대까지 이어져서, 각 함정마다 고유의 카레 조리법이 있고 그것을 모아 판매하는 식당도 생겨났다. / ‘해상자위대 카레’ 홍보 홈페이지

쌀눈에서 추출한 ‘오리자닌’

음식의 어떤 물질이 각기병과 관련이 있는지 밝혀낸 것은 1910년 스즈키 우메타로(1874∼1943)의 연구였다. 그는 쌀눈과 쌀겨의 추출물 속의 성분 하나가 각기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스즈키는 벼의 학명인 ‘오리자 사티바(Oryza sativa)’에서 따서 이 물질을 ‘오리자닌’이라고 이름 짓고, 약으로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국제적으로는 오리자닌 대신 카지미르 풍크(1884∼1967)가 제안한 ‘비타민B’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기는 했지만, 이로써 비타민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과학자들이 각기균을 찾겠다고 벌인 일들은 한바탕 우스운 소동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전세계를 놀라게 한 새로운 혁신이 일어나고 과학계의 주류들이 그 대열에 합류하려 발 벗고 나서는 가운데, 그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찬밥 신세가 되는 일은 오늘의 한국 과학계에서도 흔히 보는 모습이 아닐까? 정부가 뽑아주는 키워드를 집어넣어 연구계획서를 쓰지 않으면 연구비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구석구석 과학사

만일 미생물학의 혁신이 요즘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대통령 직속 ‘병원균 발견 위원회’가 꾸려지고 ‘세계 5대 미생물 강국’ 실현을 위한 로드맵이 발표될 것이다. 그리고 독일이 아닌 영국에서 유학한 다카키 가네히로 같은 이들의 주장은 무시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사가 말해주듯, 과학은 반드시 그런 식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