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노동운동 ‘이 장면‘](4)우리는 쉴새없이 돌아가는 기계가 아니다

몫 없는 이들의 싸움은 늘 절박하다. 그들을 없는 셈 치려는 이들 앞에 계속 모습을 드러내야 하고, 밀어내려는 이들 앞에서 ‘버티고 싸울 자리’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밀려나는 순간에도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존재로서 목소리를 내는 싸움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루 12시간 노동에 지쳐 8시간 노동제를 요구했다가, 사측의 남성 노동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사표를 내야 했던 이야기가 담긴 해태제과 여성 노동자들의 호소문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70년 6월 해태제과 입사 6년차 여성 노동자 서정남과 동료들은 잠 안 오게 하는 알약 ‘타이밍’을 먹어가며 철야작업을 버텼다. 하루 12시간 쉬지 않고 일해 캔디 1만5000~2만개를 포장하면 손이 닳고 피가 흘러 캔디 껍질에 묻기도 했다. 1975년 9월 초, 노동청장에게 보내는 한장의 진정서로 해태제과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 투쟁은 시작된다.

“회사가 일이 바쁘다고 하니 12시간까지는 우리가 참고 일하겠습니다. 그러나 12시간 이상은 너무 힘들어서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혹사를 시키면서도 ‘곱빼기’ 노동을 시키고 있어 할 수 없이 18시간을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회사에 대해 항의한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참을 수 있는 것도 한도가 있습니다. 시정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전체의 이름으로 검찰에 고발할 예정입니다. 이밖에도 휴식시간, 생리휴가, 월차휴가 등등 많은 법규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1975년 9월 9일 ‘해태 노동자들의 진정서’ 중 발췌)

인간다운 삶을 위해, 8시간 일하고도 살 수 있게 임금을 올려라

주말 특근 거부 투쟁과 서명운동으로 해태제과 노동자들은 요구사항을 얻어냈다. 해외 노동단체에서도 이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국제자유노련에서는 한국노총으로 하여금 이 사태의 진상을 보고하라는 요청을 해왔다. 결국 18시간 노동은 12시간이 됐고, 일주일에 하루 휴일과 식사시간 30분에 이어 휴식시간 30분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급제로 돌아가던 현장에서 모두가 이런 성과를 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회사는 서정남과 동료 몇명을 주동자로 지목해 감시하다가 사소한 싸움을 빌미로 해고한 후, 다시 주말 곱빼기 노동을 강요했다. 노동자들도 특근 거부를 계속했고 결국 회사는 굴복했다. 이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은 민주노조를 제대로 경험할 기회를 얻었다.

“밥 먹고, 빨래하고, 잠자고, 일하는 시간 외에 아무런 여가시간을 갖지 못함으로써 보고 듣는 것이 없으니 점점 바보스러워져 회사로부터 더욱더 괄시당합니다.”(순점순, <8시간 노동을 위하여>)

1979년 봄, 해태제과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가 필요한 이유와 그 실현을 위한 문제들을 토론을 통해 정리했다. ▲우리의 건강문제가 심각하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하다. ▲임금이 줄어들 것을 염려하는 남성 노동자들의 심각한 반대가 예상된다. ▲회사는 남녀 갈등을 부추기고 부모를 동원해 방해할 것이다. 이는 다른 사업장의 경험에서 확인한 것이다. ▲지인의 소개로 입사한 케이스가 많으니 소개자를 통한 압박이 있을 테고 회사와 결탁한 어용노조도 반대할 것이다. ▲경찰과 노동청을 비롯한 기관들도 우리 요구를 관철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논의결과는 현실의 문제로 드러나고 말았다.

같은해 7월 초 비스킷부 노동자들이 비수기(여름)만이라도 8시간 근무를 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주야 2교대 12시간 맞교대였지만, 전에도 관행처럼 여름철 주간 2교대가 있었던 탓에 회사도 받아들였다. 잔업수당을 주지 않으니 손해는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7월 17일, 산업선교회관에 모여 8시간 노동제 쟁취를 결의한 뒤 회사에 알리지 않고 8월에도 8시간 노동 후 퇴근을 계속했다. 회사는 연장노동을 거부한 여성 노동자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회사와 노동조합의 폭력을 고발하는 진정서에는 8시간제에 대한 해태 노동자들의 철학이 잘 정리돼 있다. 흔히 노동시간이 줄면 임금도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들은 “8시간 노동으로 살 수 없다면 임금을 인상하는 방향으로 조정돼야지 잔업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도록 하는 것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에서 불행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진정서를 제출한 8월 3일부터 9월 초순까지 해태제과 공장에선 매일 폭행이 일어났다. 노조 간부와 남자 직원들은 문을 철사로 동여매 감금하는 것도 모자라 여성 노동자들의 뺨을 때리고 밀쳐 넘어뜨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해태제과 여성 노동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제과업계 8시간 노동제 연내 실시’ 합의가 이뤄졌지만, 신문에는 당사자들의 얘기는 한줄도 나오지 않았다. 찬사는 제과업체 노사협의회로 돌아갔다. 제과업계에서 8시간 노동을 단계적으로 실시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1979년 9월 13일자 경향신문 사회면 단신 / 경향신문 자료사진

노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여성 노동자들의 노력은 사라진 잔치

이듬해인 1979년 8월 11일 YH무역 김경숙이 사망하면서 정치적 상황은 해태제과 투쟁을 어렵게 했다. 노동자들의 싸움을 물심양면 지원하던 영등포 산업선교회는 불순세력으로 낙인찍혀 더 이상 지원하기 어려웠고, 회사는 가족과 취업을 소개한 지인들을 통해 회유와 협박을 해왔다. 12시간 노동을 수락하지 않은 이들은 강제로 해고됐다. 다행히도 8월 말 종교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태제과노동자폭력사태대책협의회가 9월 7일 발족해 이 사안을 사회문제화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이 과정에서 전국화학노조와 식품업계 대표자들이 협의를 통해 제과업계 8시간 노동제를 연내 실시하겠다는 합의에 이르렀다.

당시 신문에는 해태제과 노동자들의 투쟁 이야기는 한줄도 나오지 않았다. 온갖 긍정적인 찬사와 평가는 제과업체 노사협의회로 돌아갔다. 노동자에 대한 폭력행위를 고발하는 일은 성과없이 묻혔지만, 18년 장기집권한 어용노조지부장 김경수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해태 계열 운수회사를 운영했다.

해태제과의 노동시간 단축투쟁은 새로운 역사를 썼고, 이후 노동조합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노동시간과 건강의 관계, 노동시간과 인간다운 삶의 관계에 대한 여성 노동자들의 질문은 여전히 시의적절하지만 말이다.

여성 노동운동 ‘이 장면‘

※참고문헌 이영재 <공장과 신화>

<림보 「회사가 사라졌다」공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