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경총이 ‘두 얼굴’을 가진 까닭

기업들엔 ‘착한 얼굴’ - 단체협상 대신 맡아 수익, 비자금 조성

노동계엔 ‘나쁜 얼굴’ - 협상 보다 결렬에 방점, 노조와해 관여

“인터넷 개통 기사는 노동자가 아니다. 오늘 교섭은 끝났다.”

2014년 민주노총 LG유플러스 비정규직지부 중노동(중랑·노원·동대문)지회와 사측의 단체협상 현장. 사측의 ‘대리인’으로 나온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소속 교섭위원은 이 한마디를 던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혹감과 모멸감을 느낀 노조는 거세게 항의했다. 그러자 경총 교섭위원은 회사로 돌아가 “노조가 나를 감금했다”며 재발 방지를 약속하지 않으면 교섭을 안하겠다고 공문을 보내왔다. 이후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고, 노조는 이후 6개월간 장기파업에 나서야 했다.

2014년 6월 30일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염호석씨의 영결식이 열리고 있다. / 김정근 기자

지난 1월 삼성그룹 계열사인 삼성웰스토리와 금속노조 삼성웰스토리지회의 첫 단체교섭 자리에도 어김없이 경총이 대리인으로 등장했다. 상견례 자리인데도 사측은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다. 80년 만에 열린 삼성그룹의 첫 노사 단체교섭은 3분 만에 파행으로 끝났다.

노조 무시·시간끌기로 일관

경총이 기업을 대신해 노조와 각종 협상을 벌여주는 이른바 ‘단체교섭 위임사업’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경총과 한 번이라도 ‘대리 교섭’을 해본 노조들은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경총 측의 교섭태도에 치를 떤다. 노동계는 노동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 가운데 하나로 경총을 꼽을 정도다. 경총은 특히 이렇게 해서 벌어들인 돈의 상당수를 직원들 보너스로 나눠준 것으로 드러나 ‘노동자를 착취해 왔다’는 비판마저 받고 있다.

2014년 LG유플러스 비정규직지부 단협 당시 사측은 LG유플러스와 하청계약을 맺고 있는 중소서비스 업체들이었다. 이들 업체는 ‘교섭 경험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교섭 시작부터 경총을 대리인으로 불렀다. 사측에서도 한 명씩은 교섭에 참여했지만 진행은 모두 경총 주도로 이뤄졌다. 말이 대리인이지 경총은 교섭에서 전권을 행사했다.

교섭에 임하는 ‘전술’ 역시 경총이 그간 교섭을 하면서 쌓은 노하우를 토대로 짜 왔다. 사측이 양보하려는 사안에 대해서도 경총이 앞장서서 잘라냈다. 박장준 희망연대 노동조합 정책국장은 “경총이 교섭 대리사업을 더 따내려면 자기 역할을 더욱 돋보이게 포장해야 하기 때문에 교섭할 때 더 지독하게 나온다”며 “사실상 교섭을 하겠다기보다는 시간을 끌어 교섭을 지연시키는 게 경총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2013년부터 4년 동안 경총과 교섭 경험이 있는 다산콜센터 노조도 경총의 ‘지연전술’에 혀를 내두른다. 120다산콜센터는 지난해 서울시가 120다산콜재단을 설립하기 전까지 민간 위탁으로 운영돼 왔다. 노조원 대부분이 감정노동을 하고 있는 다산콜센터 노조는 감정노동에 대한 수당 책정안을 제시했다. 감정노동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친철한 표정과 말투로 고객을 응대해야 하는 노동 형태로, 샤넬과 로레알코리아, 교보핫트랙스 등에서 월 3만원에서 10만원 상당의 감정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다산콜센터 노조가 샤넬의 예를 들며 감정노동 수당의 당위성을 설명하자 경총 대리인은 ‘샤넬이 무엇이냐. 샤넬이라는 회사가 있느냐. 그런 브랜드는 처음 듣는다. 샤넬에 대한 상세한 설명부터 하라’는 황당한 답을 내놨다. 이후 양측 교섭의 주제는 ‘샤넬’로 바뀌었고 교섭은 지연됐다. 노조는 경총과 교섭을 벌인 2013년과 2014년에 결국 교섭 결렬로 파업투쟁을 했다. 2015년과 2016년 역시 교섭이 결렬돼 서울시로부터 조정을 받았다. 심명숙 다산콜센터지부장은 “경총이 교섭을 위임받았으면 최소한 위임한 회사의 업무라도 파악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태도로 나왔다”며 “정상적인 교섭은커녕 교섭을 방해하러 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리교섭은 노조 파괴행위”

경총의 교섭 위임사업은 기업의 업종과 규모를 가리지 않는다. 삼성웰스토리노조의 경우 경총 대리인들과의 첫 교섭이 파행으로 끝난 이후 6월까지 매주 한 차례씩 교섭을 이어왔다. 하지만 교섭은 진척이 없었다. “사측에서 전권을 줬다”던 경총은 스스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협상 중에도 끊임 없이 사측과 통화를 했고,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아예 정회를 요청하며 시간을 끌었다. 임원위 삼성웰스토리노조 지회장은 “경총은 애초에 생각한 중재안이 없었다. 아예 교섭 진도를 정해놓고 진전된다 싶으면, 토씨 하나 점 하나를 트집잡아서 시간을 끌었다. 단어를 골라 한자의 의미를 노조에게 묻고 확인을 요구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노조와의 대화를 반기는 기업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기업 입장에서는 이 골치 아프고 지루한 작업을 대행해주는 경총이 고마운 존재다. 경총이 이렇게 기업들의 노동문제에 ‘해결사’ 역할을 하는 동안 노조는 존립위기에 처해 있다. 사측과 제대로 된 협상을 벌이지 못하는 노조는 오래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총과 대리교섭을 해본 한 노조 관계자는 “협상에서 뭐라도 진전이 있어야 노조 가입에 대한 동기요인도 생기고 노조의 단결력과 규모도 커지는 것”이라며 “대리교섭으로 시간이 지연될수록 노조는 존재감을 잃고 고사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DB금융투자노조가 바로 이 같은 경우다. 사측은 지난해 3월 노조가 설립되고 교섭을 피할 수 없게 되자 교섭에 대한 모든 권한을 경총에 위임했다. 교섭은 지난해 5월부터 시작해 올해 2월까지 23차례 진행됐다. 하지만 경총의 교섭전략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첫 상견례에 대표는 불참했고 경총 교섭위원과 회사 인사담당자가 교섭위원으로 참석했다.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경총회관. / 경향신문 자료사진

우려했던 대로 교섭은 진전이 없었다. 노조가 여러 안을 준비해 가면 경총 교섭위원은 일단 들어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회사안을 요청하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답을 미뤘다. 정작 다음 회차가 돼도 경총 교섭위원은 빈손으로 협상테이블에 나왔다. 양측 대화는 겉돌았고 결국 교섭은 결렬됐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가 중재에 나서 양측에 권고했지만 사측의 거부로 타결되지 않았다. 교섭이 제자리를 맴돌면서 지친 노조원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조합원 수도 반토막이 났다. “노조의 동력을 떨어뜨리는 전략은 100% 경총에서 기획한 일”이라며 “기업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돈만 챙기고 노조를 탄압하는 경총은 해체돼야 한다”고 말했다.

경총은 현재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조합 와해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 중이다. 경총은 2013년 사측으로부터 단체교섭권을 위임받아 노조와 임금·단체협약 등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경총이 교섭뿐만 아니라 노조 와해에도 관여를 했다는 게 검찰 수사의 요지다.

경총이 2013년부터 삼성전자서비스와 LG유플러스, SK브로드밴드 등으로부터 단협을 위임받아 처리하고 벌어들인 수익금은 20억원에 달한다. 일정하게 들어오는 수입이 아니라는 이유로 내부에 회계보고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돈이다. 경총이 밝힌 수익금의 지출내역은 더 충격적이다. 수익 20억원 중 절반이 넘는 11억원이 직원들 특별상여금으로 사용됐다. 경총의 대리교섭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고통을 겪는 동안 경총은 그 대가로 ‘보너스 파티’를 한 셈이다.

경총은 사용자단체 자격 있나

한국경영자총협회는 1970년 설립된 이래 꾸준히 세를 불려온 재계의 사용자단체다. 올 1월 기준 등록된 회원사는 전국 4303개에 달한다. 흔히 ‘경제5단체’를 지칭하면 어김없이 경총이 들어간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몰락하면서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상대적으로 경총의 위상이 높아지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재계 입장에 서서 정부의 경제정책에 날선 비판을 내놓고 있는 단체도 주로 경총이다.

이렇든 경총은 사용자 이권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단체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경총은 사용자단체로서 자격 미달인 조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단 법적인 사용자단체의 요건조차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2조 3항에 따르면 ‘사용자단체는 노동관계에 관해 구성원인 사용자에 대해 조정이나 규제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대기업 회원사의 영향력이 큰 경총은 현실적으로 회원사를 징계하거나 통제할 만한 권한이 없다. 사용자의 이권을 옹호하기 위해 각종 교섭과 노무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용자들의 단체’는 맞지만 법에서 규정하는 ‘사용자단체’로 보기에는 응당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가지지 못한 것이다.

노동계에서는 정당성과 전문성이 없는 경총이 사용자단체라는 위상을 이용해 노조를 약화시키고 노조 교섭권과 쟁의권은 물론 체결된 단체협약에 대해서도 무력화시키는 활동을 해왔다고 비판하고 있다.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변호사는 “대법원 판례를 보면 경총은 사용자단체로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스스로 위상을 찾아 책임을 다하는 사용자단체 역할을 하지 않을 거라면 경총 자체를 해체하고 각 산별노조에 대응하는 사용자단체를 새롭게 꾸려야 한다”고 밝혔다.

비판에 직면한 경총은 7월 12일 김용근 전 자동차산업협회장을 상근부회장으로 선임하면서 “내부 개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문제가 된 교섭 위임사업을 포함해 전반적인 사업 방향과 회계방식 등도 점검한다는 계획이다. 경총 관계자는 “아무래도 내부에서는 교섭 위임사업 규모를 줄이지 않겠나 보고 있다”며 “구체적인 방안은 쇄신안이 나와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어떤 쇄신안을 내놓든 경총이 사용자들의 편에 서 있는 한 노동조합과 신뢰할 수 있는 상호관계를 형성하는 ‘사용자단체’로 거듭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김성희 교수는 “노사관계가 성숙해야 사용자단체도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며 “기업들도 인식을 바꿔 노동문제를 경총에 위임하는 문제부터 개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