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가 독립PD에게 빨대 꽂는 법

EBS, 자연 다큐 <야수의 방주> 저작권과 정부 지원금의 40% 요구

2009년 12월 7~9일 EBS 다큐프라임에서 방영된 <말라위, 물 위의 전쟁>은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를 가진 국가 말라위를 무대로 인간과 야생동물이 벌이는 생존전쟁을 그린 다큐멘터리다. 1인 다큐멘터리 제작사 ㈜블루라이노픽처스 대표 박환성 PD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석 달간 현지에 머물면서 제작했다. 2010년 한국PD연합회가 주관하는 한국방송 PD 대상 TV독립제작부문 작품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의 저작권은 박 PD에게 없다. EBS와 방영계약을 맺으면서 저작권을 양도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박 PD는 불리한 계약을 맺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업계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계약을 합니다.”

2017년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한국독립PD협회와 박 PD는 EBS가 올해 10월 방영 예정인 자연 다큐멘터리 <야수의 방주>의 저작권과 정부가 지급한 제작지원금의 40%를 방송사 간접비로 입고시키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2011년 EBS 다큐프라임에서 방영된 「호랑이 수난사」. 멸종위기에 처한 호랑이를 다룬 내용으로 (주)블루라이노픽처스가 제작했다. EBS에서 방영된 박환성 PD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EBS가 저작권을 갖고 있다./블루라이노픽처스 제공

EBS “협찬금 배분 EBS 내부 규정 따라야”

EBS는 규정에 따른 조치이며 박 PD 측이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다고 맞서고 있다. 독립창작자를 지원하기 위한 정부 지원금이 새나가고 권리마저 거대 방송사업자에게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 미래부·문화부·방통위 등 관련 당국은 적극적으로 진상조사에 나서지 않고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콘텐츠 강국을 꿈꾸기에는 뿌리부터 취약한 게 현실이다.

블루라이노픽처스와 EBS는 지난해 8월 50분짜리 2부작 다큐 <야수의 방주>의 방영계약을 체결했다. 계약금액은 편당 6970만원으로 총 1억3920만원(2부작)이다. 계약 당시 담당자였던 EBS 측은 박 PD에게 제작비 조달계획을 물었고, 박 PD는 정부 공공기관 3곳에서 독립창작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콘텐츠 제작지원사업에 응모할 계획임을 구두로 밝혔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한국콘텐츠진흥원, 미래창조과학부 산하의 한국전파진흥협회,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이 이에 해당한다. 이 과정은 <주간경향>이 입수한 박 PD와 EBS 편성기획 담당자 김모 PD 사이의 대화 녹취록에 담겨져 있다. 블루라이노픽처스는 2017년 4월 25일 한국전파진흥협회의 ‘2017년 차세대 방송용 콘텐츠(UHD) 제작지원’에 선정돼 1억 2000만원 중 4800만원을 제작비로 선지급 받았다.

블루라이노픽처스는 이 사실을 알리자 EBS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블루라이노픽처스에 있는 <야수의 방주>의 저작권을 EBS가 갖도록 한국전파진흥원과의 협약서를 변경해올 것. 둘째. 지원금도 협찬으로 간주해 40%를 EBS에 입금할 것. 전자의 경우 EBS 법무팀의 검토를 거쳐 공문으로 전달했다. 후자의 경우 문자메시지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전달했다. 전자의 경우 근거가 관행이라면 후자의 경우 근거는 블루라이노픽처스와 EBS가 지난해 8월 사인한 계약서였다. 계약서 16조 4항에는 ‘협찬 유치 시 외주 제작사 상생협력방안에 따른다’고 돼 있다. EBS 측의 논리는 이렇다. 한국전파진흥협회가 블루라이노픽처스에 지원한 금액은 일종의 협찬이다. 박 PD는 EBS에 알리지 않고 협찬을 받았다. 이는 계약 위반으로 EBS는 박 PD에게 애초 주기로 한 제작비의 일부를 주지 않아도 되며, 협찬금 배분은 EBS 내부 규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EBS의 상생협력방안에 따르면 제작사가 프로그램 제작과 관련해 제3자로부터 EBS와 합의 없이 제작비를 지원 받은 경우 제작비 일부 또는 전액을 감액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박 PD가 받은 문자메시지에 따르면 협찬금의 20%는 (제작사) 인센티브, 40%는 제작비 투여 명목으로 제작사가 갖고 나머지 40%가 EBS 간접비 환수로 돼 있다.

박 PD는 두 가지 논리로 다시 반박하고 있다. “한국전파진흥협회의 지원금은 보다 나은 다큐멘터리 제작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이지 협찬이 아니다. 또한 계약 당시 정부 지원에 응모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으므로 위반이 아니다.” EBS가 정말로 박 PD의 정부 지원 응모 사실을 몰랐다면 내부에서 인수인계 과정의 미비로 일어난 일을 외부 계약자에게 넘기는 행태라는 것이다.

EBS의 관점을 이해하려면 한국 다큐 시장의 관행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송규학 한국독립PD협회 회장이 설명했다. “2000년대 초부터 ‘협찬다큐’라는 것도 유행하게 됐다. 한국의 방송가에는 제작비 표준이라는 것이 없다. 방송사가 그때그때 예산을 책정하며 부족한 제작비는 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각종 협회 등의 협찬을 받아 충당했다. 대신 그들이 원하는 내용을 다큐멘터리 안에 집어넣어야 했다. 다큐멘터리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시스템이다.” 기업 등에 접촉해 ‘협찬’을 따오는 역할은 제작사가 맡았지만 협찬금은 방송사에 지급됐다. 더 큰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EBS가 정부 지원금의 일부를 내놓으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배경이라는 것이다.

“해외 방송사는 창작자의 저작권 보장”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분석도 독립PD협회의 설명과 유사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15년에 낸 보고서(방송영상콘텐츠 표준제작비 산정을 위한 기초자료 연구)에 따르면 2003년 전후로 국내 외주제작 시장이 크게 변화했다. 케이블, 인터넷 등의 여파로 TV 시청률이 낮아지고 지상파 방송국의 광고수익이 감소하면서 지상파 방송사들이 외주제작비를 대폭 삭감했다. 문화부는 2002년 방송사와 제작자 간 표준계약서 시안을 발표했다. 외주제작의 경우 저작권을 외주제작사에 넘긴다는 내용이 핵심이었지만, 방송사들의 반대로 도입되지 않았다. 2004년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2012년에야 저작권을 제작자가 갖도록 하고 방송사는 방영료로 수익을 얻도록 한 표준계약서를 도입한다.

한국전파진흥협회는 저작권 이전을 핵심으로 하는 협약서 변경을 불허했다. 정부의 방송진흥책에 따르면 당연한 처사였다. 단, 한국전파진흥협회 관계자는 “언론 보도 등을 보면 EBS와 블루라이노픽처스의 주장이 너무 다르다”며 진상조사 등의 조치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블루라이노픽처스는 지난 5월 EBS를 공정거래위원회 서울사무소에 제소했지만 본격적 조사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박 PD는 “엄연히 방송사와 제작자 간 갑을관계에 의한 문제인데 공정거래위원회는 동등한 당사자 간 계약분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전파진흥협회의 제작비 지원조건은 프로그램을 UHD로 만들 것과 제작완료 후 1년 이내에 송출할 것 등이다. 방송사가 ‘수틀리면’ 프로그램 방영을 안할 수도 있고 책임은 제작자가 떠안아야 할 상황이다. 해외 방송사와 주로 작업을 하는 미디어그룹 ‘보다’ 소속 최우영 PD는 국내 방송사의 관행이 글로벌 스탠더드와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BBC 등 해외 방송사는 제작사와 ‘협력’ 형식으로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며, 저작권 등 창작자의 몫을 보장한다. 그러다보니 참여자가 많고, 제작비도 많이 모이며, 우수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게 된다. 국내 방송사는 이런 개념이 없다”고 말했다. 최 PD는 “이번 사안에서 최대 피해자 중 하나는 방송사업의 진흥을 위해 노력해온 정부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며 “나름대로 방송 제작환경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정확한 실상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na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