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30) “이젠 오란 데도 없고 갈 데도 없습니다”

“친구가 궁상떨지 말고 술 한 잔 하자며 불렀지만 술 재미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아 혼자 방에서 소주 한 잔하면서 지난 세월 생각해보니 내 처지가 한심하고 뭔지 모르게 가슴이 미어집디다.”

“선생님 억수로 죄송합니다. 너무 일찍 전화해서.”

“밤새 무슨 일 있으셨어요?”

“일이 아니라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한숨도 못 잤습니다.”

명절이 되니까 더 화가 난다는 그는 초췌한 모습으로 약속보다 일찍 왔다.

“얼굴이 꺼칠해 보이는데 연휴 동안 많이 힘드셨군요. 식사도 잘 못하셨나 봐요.”

“아닙니다. 누구 좋으라고 안 먹겠습니까? 먹는 건 잘 먹습니다.” 몇 주 전 처음 방문했을 때가 생각난다. 눈도 맞추지 못하며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빙빙 돌려 말하던 그였다.

“잘 하셨어요. 건강을 챙기셔야지 앞으로 어떤 일이든 감당할 수 있죠.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는 내 물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동안 자신의 고달팠던 마음을 쏟아낸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합니다. 한평생 열심히 일한 죄밖엔 없는데 이제 와서 즈그들이 나를 이렇게밖에 보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닙니다. 사업하느라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죽도록 고생해서 등 따숩고 배 두드리며 살게 해줬는데 어떻게 나보고 가정에 관심 없었다는 둥 배에 기름찬 소릴 할 수 있는지 정말 기가 찹디다. 식솔들 먹여 살리고 새끼들 공부 가르치면 됐지 뭐가 부족해 즈그들이 작당해서 날 이리 팽개치고 돈밖에 모르는 부도덕한 인간으로 만드는지, 그게 무슨 마누라고 자식새낍니까?”

“생각할수록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정말 참기 힘들었겠어요.”

“말로 다할 수 없지요. 밤에 잠을 잘라 치면 울화가 속에서 치밀어 올라와 벌떡벌떡 일어납니다. 냉수 한 사발 들이키고 날밤을 새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그 재산을 모으려고 말도 못할 고생하며 남한테 모진 짓도 많이 했지요. 그게 다 내게 딸린 식솔들 때문이었는데…. 한평생 내 덕에 편안히 살아놓고 이제 살 만하니까 이혼소송을 해서 내 재산을 몽땅 갈라간 거라. 지들이 한 게 뭐 있고 판사 지가 뭘 안다고 남의 가정에 이래라저래라…. 이런 개 같은 세상이 어디 있습니까.” 그의 속사포 같은 상한 마음이 파편처럼 정신없이 날아다닌다.

“얼마나 속상하셨어요? 아무도 내 맘을 몰라주니, 아니 가족조차도 이런 내 맘을 몰라주고 오히려 뒤통수를 치니 정말 야속하고 기가 막혔겠어요. 더군다나 가정을 일으켜 세우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셨는데.”

한 노인이 스마트폰을 이용해 문자를 보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세상과 가족에 대한 극한 배신감

젊은 시절 그는 너무나 가난했다. 공부는 고사하고 단 하루도 배고프지 않은 날이 없었단다. 무책임한 형들은 고향을 떠나 어디론가 흩어지고 그가 동생들과 혼자된 어머니를 부양하며 어렵게 살았다. 억척같은 어머니와 어머니 닮은 아들은 그렇게 힘을 모아 평생 따라다닐 것만 같았던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조금씩 몰아내고 늦은 나이에 가정도 꾸렸다. 사업은 그의 고생을 보상해 주었고, 돈 모이는 재미로 살았단다. 쓸 줄 모르고 모으기만 할 줄 안다며 가족은 그와 마찰이 심했지만 그는 훗날 가족을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비난도 원망도 모조리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어처구니없는 이혼 사유로 맞섰다. 더군다나 이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도와 현실이 너무나 어이없고 세상과 가족들에 대한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눈을 감은 그의 양미간에 깊은 골이 파이고 입은 굳게 다물었다.

“말씀하시면서 마음이 많이 착잡하셨나 봐요. 지금은 마음이 좀 어떠세요?”

“그동안 누구도 나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오히려 날 원망하고 비난만 합디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어요.”

“그동안 몸도 맘도 참 고생이 많았겠어요.” 그의 두툼한 손이 순간 응석받이 어린아이 손처럼 눈물을 훔친다.

“소송 과정에서 부동산들을 헐값에 처분하고 억수로 많이 울었지요. 물론 즈그들 얘기 들어보니 아내 입장을 조금은 알 것 같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혼당할 만큼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럴 순 없습니다.” 원망과 회한의 소리가 그의 온몸과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과 달리 점점 매달릴 곳을 찾는 것 같다.

“나는 아무 취미도 없이 오직 돈 모으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니 세밑이다 새해다 모두들 왔다갔다 하는데 나는 오란 데도 없고 갈 데도 없습디다. 그나마 내 처지를 아는 한 친구가 궁상떨지 말고 술 한 잔 하자며 불렀지만 술 재미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아 혼자 방에서 소주 한 잔 하면서 지난 세월 생각해보니 내 처지가 한심하고 뭔지 모르게 가슴이 미어집디다.”

“가족도 없이 연말연시가 되고 보니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됐나 허무하고 참 외로웠겠어요.” 그에게 깊은 쓸쓸함과 침묵이 다시 흐른다.

“나는 어려서부터 우리 어머니 고생을 많이 봤습니다. 돈이 얼마나 중한 것인지 뼛속까지, 정말이지 뼛속뿐 아니라 살점 구석구석에 맺혀 살았지요. 그 당시 내가 며칠씩 굶어도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습디다. 어머니조차도 어쩌질 못했으니까 다 나 혼자 해결해야 됐지요. 그래서 마누라와 새끼들만큼은 이 징글맞은 가난을 물리지 않으려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살아 왔는데…. 그래도 운 좋게 사업에 성공도 했고….”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한 채 굵은 눈물을 흘리며 창밖 너머만 바라본다.

부인·자녀들에게 마음 전해 본 적 없어

“어린 나이에 그 고생을 다 이겨내고 큰 재산을 모을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선생님이니까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어떠세요?”

“그동안 나름 자부심을 갖고 살아 왔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잘 모르겠습니다.”

“많이 혼란스럽지요?”

“그렇죠, 마누라뿐 아니라 자식새끼들까지도 저렇게 나오니 허망하고….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씩 들기도 합니다.” 그는 한참 동안 그 마음에 머물러 있는 듯 생각에 잠겼다.

“지금 심정이 어떠세요?”

“글쎄요. 전에 마누라가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라고 악을 쓰던 기억이 납니다. 말같지도 않아 무시해 버렸는데 왜 이 말이 자꾸 생각나는지 모르겠네요.”

“그 말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셨어요?”

“철없는 소리라고 생각했지요. 한편 마누라가 내 고생을 몰라주는 것 같아 섭섭하기도 했고….”

“지금은 그때 부인이 어떤 심정으로 그렇게 얘기한 것같이 생각되세요?”

“……. 나름 뭔가 속상하고 화가 나서 그러지 않았을까….” 그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지금은 아내에게 어떤 마음이 드세요?”

“……. 조금 미안하지요. 늘 무시했으니….” 그의 목소리가 처음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깊고 나지막해졌다. 그는 부인이나 자녀들에게 그의 마음을 전해 본 적이 없었단다. 아무도 그에게 귀 기울인 적이 없었고, 그도 다른 사람들에게 귀 기울인 적이 없었다. 그의 마음은 늘 혼자였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지고 가야 할 몫이라고 하면서, 왜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가족들을 위해 고생하며 사셨나요?”

“그야 내 식구들이니까 책임져야죠.”

“본인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 말없이 혼자 감당하며 살았는데 가족은 막상 선생님의 생각을 모르니, 턱없이 매정한 가장이라고 오해하며 양쪽 모두 상처받고 힘들지 않았겠어요? 마음을 나누지 않으면 가족끼리라도 서로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요? 연락은 되시나요?”

“단축번호 1부터 5까지가 식구들 껍니다. 마누라, 아들, 딸, 며느리, 사위지요. 아직 그대로지요.”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흘끗거리던 핸드폰을 집어들며 그가 말했다. 핸드폰 번호들 사이로 그의 엄지손가락이 방향을 못 잡고 헤맨다.

“전화 한 번 해보시지요?” “아마 안 받을 겁니다.” 어느새 한 버튼을 누르며 멋쩍게 그가 다시 말한다. “받을 리가 없지요.” 자신이 그랬듯이…. 그때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바쁘게 흘러넘친다.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

“아빠? 아빠지?”

<서송희 만남과 풀림 대표 suh06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