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하고 고독한 한의 세월 70년

<자이니치의 정신사> 쓴 윤건차 교수, 북한 밀항 후 군사훈련 등 인생의 비밀도 고백

일본제국의 식민지배로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은 1945년 무렵 200만명에 이른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많은 사람이 귀국하지만 60만명이 돌아오지 못하고 남겨진다. 1947년 5월 2일 일왕의 마지막 칙령으로 외국인 등록령이 발표된다. 다음날 5월 3일부터 대일본제국 헌법 대신 시행되는 일본국 헌법을 앞두고였다. ‘대만인 가운데 내무장관이 정한 사람과 조선사람은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가 일왕의 마지막 칙령이었다.

외국인 등록령이 일본국 헌법 발효 전날 발표된 이유가 있다. 연합군사령부가 작성한 일본국 헌법의 초안은 ‘우리 일본국 인민(我等日本?人民)’으로 시작한다. 미국 헌법이 ‘우리 미국 인민(We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인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본은 이에 반대하고 ‘국민’을 고집해 ‘일본 국민(日本?民)’으로 바꾸어낸다. 그리고 새 헌법 시행 전날 조선인을 외국인으로 만든 것이다.

지난 8월 27일 윤건차 교수가 <자이니치의 정신사> 집필 과정을 설명한 뒤 교토타워 앞에서 학창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교토 | 이범준 기자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자이니치
조선인에게 기본권을 주지 않으려고 일본 국적을 박탈한 것이다. 가령 1961년 만들어진 의료보험과 연금의 이름이 ‘국민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이고, 조선인들은 여기에서 제외된다. 기본권, 즉 기본적인 인권의 조건으로 국적을 요구했다. 이후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일에 조선인은 법무성 민사국장의 통달로 완전히 외국인이 된다. 통달은 법령도 아니고 일종의 사무지침이다.

앞서 1947년 일본 정부는 외국인등록을 하면서 국적을 표시해야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조선반도에서 건너왔다는 의미로 조선으로 표기했다. 그래서 이들의 조선은 국적이 아니라 지역이다. 자녀나 손자도 조선으로 적혔다. 이후 일본 정부는 ‘지역 조선’에서 ‘국적 한국’으로 바꾸게 했다. 미승인 국가인 북한으로의 변경은 허용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 많은 이들이 한국, 더 지나서는 일본 국적으로 바꾸었다. 국적이 무엇이든 식민지를 계기로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인과 그 후손이라는 의미로 묶어 부르는 단어가 ‘자이니치’다. 자이니치 조센진(在日朝鮮人)을 줄인 말이다. 현재 100만명에 이르러 일본 인구의 1%다. 이들은 일본인의 극심한 차별을 받으면서 조선이름을 숨겨두고 일본이름만 썼고, 단시간에 우리말을 하지 못하게 됐다.

자이니치들은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기록하고 규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해 왔다. 윤건차 가나가와대 명예교수(72)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필생의 작품으로 내놓은 <자이니치의 정신사> 전 3권이 지난해 9~11월 일본 이와나미(岩波書店)에서 잇따라 출간됐다. 그리고 최근 한겨레출판에서 한 권으로 묶여 번역 출판됐다. 연인원 200여명을 인터뷰한 생생한 기록을 바탕으로 자신의 모든 학문적 성과를 집약시켰다. 민족, 국가, 사상, 역사를 가로질러 삶에 대해 써내려간 걸작이다.

특히 <자이니치의 정신사>에서는 만년의 저자가 지금껏 숨겨 왔던 북한과 관련된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를 고백하고 드러냈다. 윤 명예교수는 “고민을 견디고 버티면서 살아 왔다. 문제가 되면 여러 사람이 복잡해질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자이니치는 여전히 ‘세 나라’의 틀 안에 놓여 있다. 한반도가 통일되고 남북한 양쪽 국가기구의 기밀자료 등이 공개되어 자유롭게 열람과 집필이 이루어질 수 있을 때까지는 그 전체상을 도저히 그려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27일 일본 교토를 찾아 저자와 3시간 동안 인터뷰했다. 질문과 답변은 일본어판의 제3권, 한국어판의 제7~9장에 집중했다. 윤건차 교수 개인사를 여기에서 상당 부분 풀어놓았고, 당면한 자이니치 문제에 대해 미래의 관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윤 교수는 교토대학 졸업 이후 도쿄대학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시작한 도쿄 생활을 정년퇴임과 함께 마치고, 현재는 고향 교토에 돌아와 지내고 있다. 2015년 정년퇴직을 앞두고 2013년 교토로 돌아가 2년간은 요코하마까지 통근했다고 한다.

/ 한겨레출판

자이니치 2세들, 사회주의에 대해 선망
윤 교수는 어려서부터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우울한 생활을 하다가 대학에 들어가서야 사람들을 사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조선에서 태어난 자이니치 1세들과 달리 일본에서 태어난 2세들 상당수가 겪는 불안이자 장애이다. 1세들은 이미 말투에서 조선인임이 드러나기 때문에 처음부터 차별을 마주하고 일본 사회에서 격리된다. 하지만 2세들은 일본어 네이티브이고 주민표에 일본이름을 등록해 쓰는데,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만다. 학창시절을 거치면서 수동적이고 위축된 인격을 갖게 된다. 그런 그에게도 장래를 결정해야 할 시기가 온다.

“재일조선인은 거의 모든 자격에서 배제돼 있었다. 유일하게 의사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수학과 생물이 싫었고, 작은 생명체나 인간의 신체를 접촉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0년대 초반이다. 용기를 내서 교토지방재판소에 전화를 걸었다. 재일조선인인데 변호사가 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사무관쯤일 텐데 수화기 건너로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어이, 조센진이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데’. 그러고는 그런 방법은 없다며 쾅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때 받은 굴욕감이 지금도 선명하다. 현실의 냉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재수생활을 거쳐 교토대학 교육학부에 들어갔다. 교토대학 문과계열에서 커트라인이 가장 낮다는 이유뿐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온갖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했다. 사실 별달리 친구도 없었다. 파친코, 유흥업소, 고리대금 세 가지를 빼고는 안 해본 게 없다. 대학교 2학년 때는 가내공업마저 도산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기모노에 쓰이는 연사를 만드는 일로, 기계 소음과 접착제 냄새에 시달리는 영세 중노동이었다. 그가 사람을 만난 것은 3학년 때 재일본조선유학생동맹(유학동)에 들어가면서다. 인간으로서의 연대, 동포로서의 친밀함과 인정을 느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의 학생단체지만 북한을 지지하지 않아도 가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교토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도 되지 않고 별다른 대책이 없어 도쿄대학 대학원에 들어갔다. 대학원 합격 후 졸업 직전인 1968년 2월 갑자기 조선총련 중앙교육부의 ‘지도원’에게 도쿄에 가면 유학동과 멀어지라는 지시를 받았다. ‘동무에게는 특별한 임무가 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인생에서 갖게 된 인간관계, 동료의식을 버리고 적막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을 예감했고, 그것만으로도 앞길이 캄캄했다. 지도원은 도쿄에서 두 번 만났고, 바로 스무 살 위의 ‘형님’에게 인계됐다. 어디의 누군지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찻집에서 ‘교육’이 시작됐다. 수령론 학습을 시작으로 그런 것만 했다.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작은 중요시되지 않았다.”

지난해 9~11월 일본 이와나미(岩波書店)에서 출간된 <자이니치의 정신사> 전 3권. 각각 우리, 마음, 하나라는 부제가 붙었다. / 이범준 기자

“모든 힘을 쏟은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남북한이 나뉘기 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자이니치 1세와 그들을 부모로 두고 일본에서 태어난 자이니치 2세들에게 남북한 어느 쪽도 먼 나라다. 그들이 가진 한국 또는 북한에 대한 지지라는 것도 선호에 가깝다. 특히 1960~70년대에는 일본 인텔리 사회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선망이 있었고, 자이니치도 예외가 아니었다. 윤건차 명예교수의 표현을 따오면, 당시 많은 자이니치에게 공화국, 김일성, 사회주의는 희망이자 꿈이며 미래의 모든 것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자이니치 가운데 98%가 경상·전라·제주 등 남쪽 출신인데도 1959년부터 25년간 186회에 걸쳐 9만3339명이 가본 적 없는 북한으로 이주하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북한에 밀항한 적이 있음을 책과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박사과정에 진학한 뒤인 1971년 봄이었다. 아키타의 해안에서 마중 나온 배에 올랐다. 하루 밤낮이 걸려 원산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에 항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공허한 시선과 닿았고, 곧바로 한 줄기 희망이 부서졌다. ‘조국’에 대한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평양 초대소에서 매일 학습하고 영화를 보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나 혼자였는데, 반나절에 걸친 흉내 수준의 통과의례였다. 실전에서는 도저히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노동당 가입을 요구받았으나 주저하며 거절했는데, 그러면서 나를 포기한 것 같다. 결혼한 직후인 1972년 지정받은 도쿄 요요기의 찻집에 갔지만 ‘선(線)’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 하늘은 맑게 갠 푸른색이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이성의 마비였고 환상에 불과했던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저자는 교토에서의 인터뷰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나의 모든 힘을 다 쏟았다. 정신사로 이름 붙인 이유는 단순히 역사나 사상사가 표현하지 못하는 인생의 문제, 특히 자이니치의 모든 삶을 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윤 교수는 지난해 일본에서 책을 내면서 혹시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외국인으로 등록된 자이니치들은 일본으로 돌아와도 좋다는 재입국 허가를 받아 외국에 가야 한다. 하지만 주목받는 윤 교수가 지난해 이 책에서 북한 밀항 사실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일본 법조계 관계자는 “밀항은 계속범이라 공소시효가 사실상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45년 전 일을 가지고 문제 삼는 것은 힘든 일이다. 별일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이달 24일 서울을 방문한다. 자신의 인생을 모두 고백한 자이니치와 윤건차 개인의 역사를 한국에서 더 깊이 얘기하고 싶어서다.

윤건차 1944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한국인 2세다. 교토대학을 졸업하고 도쿄대학에서 ‘조선근대교육의 사상과 운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가나가와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일본 근대사상사, 한국 현대사상사, 근대 한일관계사를 가르쳤다. 그는 서구 숭배사상, 천황제 이데올로기, 아시아 멸시관이 일본인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서구 숭배와 아시아 멸시는 동전의 양면이며, 이질적인 타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있다고 말한다.

<교토 | 이범준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seirot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