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운명은 양육과 환경이 결정한다

최근 과학계 후성유전학 각광… ‘기존 DNA 결정론은 오류’ 주장

일란성 쌍둥이가 있다. 이제 갓 스무살. 그러나 형제의 모습은 판이하게 달랐다. 형은 전형적인 청년의 모습. 동생은 아직 사춘기도 채 지나지 않은 소년 같았다. 근육도 빈약하고 수염도 나지 않고 목소리도 가늘었다. 어머니는 동생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는 동생에게 ‘칼만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칼만 증후군은 성 발달장애의 일종이다. 칼만 증후군은 몇 가지 발달장애를 야기한다. 성 발달장애뿐만 아니라 후각도 영향을 받는다. 알고 보니 형도 칼만 증후군이었다. 대신 형은 성 발달이 손상된 것이 아니라 후각이 손상돼 있었다. 칼만 증후군은 유전질환이다. 그러나 동생만 유독 심한 증상이 나타났다. 이유는 무엇일까. 똑같은 유전적 결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은 왜 다르게 발현될까.

일란성 쌍둥이임에도 자랄수록 다른 모습을 보이는 사례는 종종 있다. 이는 기존의 유전학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과거의 유전학자들은 성격이나 체질은 유전적으로 미리 결정돼 있다고 주장해 왔다. 주어진 DNA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쌍둥이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DNA가 생명체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가설에 오류가 많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현대의 유전학자들은 이를 ‘후성유전학’으로 설명한다.

유전자 검사 과정 / 주간경향 자료사진

먹는 음식, 운동 습관 등 유전자에 기록
후성유전학은 유전자 구조가 같음에도 유전자가 다르게 발현되는 현상을 설명한다. 환경과 유전자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후성유전적 과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메틸화다. DNA에 메틸기가 붙는 것을 뜻한다. 메틸기가 유전자에 붙으면 유전자의 발현이 억제된다. 메틸화된 DNA는 세포가 생존하는 동안 그대로 유지되며 자손 세포들에게 전달된다. 예컨대 생쥐는 핥기로 모성적 보살핌을 표현한다. 이 보살핌의 유무를 통해 GR라고 불리는 유전자에 메틸화가 진행된다. 메틸화에 따라 유전자가 켜지기도 하고 꺼지기도 한다. 좋은 보살핌은 탈메틸화로, 나쁜 보살핌은 메틸화로 이어진다. GR 유전자가 메틸화되면 GR 단백질이 덜 생산된다. 이에 따라 생쥐는 두려움과 불안을 쉽게 느끼며 스트레스에 취약한 성향이 된다. 이러한 후성유전적 효과는 당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나아가 그보다 더 멀리까지 전달될 수 있다. 학계에서는 후성유전학은 아직 연구의 시작 단계라고 말한다. 후성유전적인 현상이 발견되는 사례는 많이 찾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환경이 어떤 유전자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찾지 못했다.

후성유전학은 먹는 음식, 운동 습관, 복용약 등 모든 경험이 유전자에 기록된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나아가 후성유전학적 변화는 신체뿐만이 아니라 정신에서도 나타난다. 연구에 따르면 한 세대에서의 정신적 외상은 유전적으로 그 다음 두 세대에까지 이어진다. 커다란 충격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가진 사람들의 대부분이 낮은 코티솔 호르몬 수치를 가졌다. 이는 이미 1980년대에 참전 군인들을 연구하면서 알려진 과학적 사실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PTSD 증상이 자손에게까지 유전된다는 연구가 발표됐다. 뉴욕 마운트 시나이 의학센터는 9·11 테러가 발생했던 2001년 9월 11일에 쌍둥이 빌딩 근처에 있었던 임산부들의 타액 샘플을 연구했다. 이들은 사고 후 PTSD를 겪었다. 이들의 코티솔 수치는 상당히 낮았고, 이는 나중에 그들에게서 태어난 아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 9·11 당시 임신 후기였던 아기들의 경우 코티솔 수치는 더욱 낮았다. 연구진은 아이들이 성장한 후에 다시 이들을 검사했다. 그 결과 이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더 쉽게 스트레스를 받는 경향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시간이 흘러 정신적인 치유가 끝났다고 느끼더라도 유전자는 충격적 사건들을 그대로 기록해 놓는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다음 세대에까지 전달된다.

책 <괴물의 심연>

이러한 후성유전학적 발견은 자연스럽게 환경과 양육의 중요성의 강조로 귀결된다. <괴물의 심연>은 후성유전학에 근거해 양육의 중요성을 역설한 책이다. 책의 지은이 제임스 펠런은 미국의 유명한 뇌과학자다. 그의 2008년 TED 강연은 크게 화제가 됐다. 사이코패스의 뇌를 연구하던 그는 사이코패스 뇌의 대조군인 정상인의 뇌 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자신의 뇌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정상적일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뇌 사진은 사이코패스의 뇌 구조와 놀랄 만큼 유사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계보를 추적해본 결과 자신의 조상 중에서 악명 높았던 살인자가 여럿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뇌 사진과 족보를 확인하면서 “같은 뇌를 갖고 태어난 나의 조상들은 살인마가 되었는데 나는 왜 성공한 과학자로 멀쩡하게 살고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진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책의 맨 앞장에 나와 있다. “나의 어두운 본성을 오래 전에 깨달았음에도 나를 잘 자라도록 보살펴 준 나의 부모에게.” 즉 부모의 양육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사이코패스를 만드는 세 가지 요인으로 고위험 변이 유전자 여러 개, 전측두엽의 유별난 저기능, 어린 시절의 학대를 꼽았다. 고위험 변이 유전자와 전측두엽의 저기능을 갖고 10대 시절 강박증과 극단적 종교성을 드러내는 등의 문제적 행동을 보였던 그였지만, 그가 사이코패스로까지 나아가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부모의 양육이 있었다. 그는 부모가 자신을 내치지 않고 보살펴줬기 때문에 자신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성격과 행동은 본성의 80% 정도를 결정하고 양육은 20%밖에 결정하지 않는다’는 유전자 결정론을 지지했던 그는 이제는 양육과 환경이 인간의 삶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후성유전학의 전문적인 연구는 아직 시작 단계다. 그러나 환경이 유전자의 발현에 영향을 미친다는 후성유전학의 기본 토대는 비전문가인 일반대중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후성유전학에 근거해 음식 섭취의 중요성을 강조한 다큐멘터리 <당신이 먹는 게 삼대를 간다>가 화제가 됐듯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먹는 것, 나의 습관, 정신건강, 대인관계가 후손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매 순간이 주는 무게감은 이전과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후성유전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이 갖고 태어나는 유전자에 의해 수동적으로 운명지어지지 않는다. 2010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후성유전학을 다룬 기사의 제목은 ‘Why your DNA isn’t your destiny?’였다. 유전자가 곧 운명이 아니라 주어진 유전자의 한계는 극복 가능하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다. 인간은 더 이상 유전자 지도에 의해 통제되는, 주어진 시스템의 일부인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후성유전학에 근거하면 인간은 환경과 상호작용을 주고 받으며 유전자가 좋은 방향으로 활성화될 수 있도록 견인하는 능동적 주체다.

책 <유전자, 당신이 결정한다>

연구 시작단계… 암 치료에 활용 가능성
후성유전학자는 암 치료에도 희망적인 관점을 시사한다. 책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는 “후성유전학의 발전으로 우리의 삶이 송두리째 바꿔질 것”이라면서 잘못된 후성유전학적 프로그래밍을 재편성하는 약이 개발되면 암을 비롯한 난치성 질병도 극복 가능하다고 말한다. 암 유전자와 종양 억제 유전자가 켜지거나 꺼질 수 있다는 것을 통해 장기적으로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 <유전자, 당신이 결정한다>는 후성유전학이 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우리는 이제 깨어나서 우리의 유전적 자아와 진화적 계보를 새롭게 이해하려 한다. 단순히 우리의 DNA 안에 코딩된 운명의 노예에서 벗어나 우리는 우리 안에 상당한 유동성이 있음을 알아내고 있다. 곡조를 바꿀 수 있는 타고난 능력으로 우리의 음악을 다르게 연주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원적인 멘델식 유전 운명에 관한 기존의 이해방식을 극복할 수 있다.”

반면 환경에 따라 유전자의 발현이 달라지는 만큼 양극화된 한국 사회에서 유전자 또한 양극화될 우려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유전자를 타고 났어도 음식이 바뀌면 건강도 달라지고 그것이 자식 세대로까지 유전된다. 대표적인 것이 비만이다. 비만은 여러 가지 소인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는데, 후생유전학이 제시하는 가설 중 하나는 절약 유전자 가설이다. 한때 주기적으로 기근이 발생하는 환경에 노출된 인구 집단들은 칼로리를 지방으로 변환해 저장하도록 진화했다. 그런 개체는 식량이 부족할 때에는 절약 유전자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으나 식량이 풍부할 때에는 오히려 뚱뚱해지고 당뇨에 걸릴 위험이 높았다. 이러한 논리로 제임스 바커는 절약표현형 가설을 제기했다. 산모가 영양상태가 나빠 태아가 태반을 통해서 영양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면 태내에서 절약표현형을 갖도록 프로그래밍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절약표현형을 갖고 태어난 아기들은 절약유전자를 보유한 개체가 그렇듯 출생 후 비만이 될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 비만과 과체중은 후천적인 생활방식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고, 비만은 더욱 삶의 질을 떨어뜨려 그들의 2세에게 대물림되어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저소득층의 먹거리는 영양 불균형인 상태가 많고 가난할수록 비만한 사람이 많다. 긴 노동시간에 시달리는 저소득층에게 값싸고 질나쁜 저가의 식품들이 주식이 되기 쉽다.

2008년 보건복지부가 전국 864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비만은 교육수준과 소득이 낮을수록 높았다. 체질량지수(BMI) 25 이상을 과체중 및 비만으로 볼 때, 소득수준이 가장 낮은 집단에서 비만율이 32.8%로 가장 높았으며, 교육수준이 초등학교 졸업 이하인 집단에서 38.4%로 비만율이 가장 높았다. 후성유전학은 운명결정론의 대척점에 서서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창조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그러나 반면 환경이 극단화된 사회에서는 스스로의 삶을 창조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군가에게는 애초에 제한될 수 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참고자료
<유전자, 당신이 결정한다>, 샤론 모알렘, 김영사 <쉽게 쓴 후성유전학>, 리처드 C. 프랜시스, 시공사 <괴물의 심연>, 제임스 펠런, 더쾌스트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