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진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2015강정생명평화대행진 ‘함께 걷자 생명의 강정, 함께 살자 모두의 평화’ 주제로 열려

7월 27일 낮 12시. 땡볕이 작열한다. 30도를 넘긴 한여름 더위다. 강정생명평화대행진 시작점인 제주시청을 출발해 동쪽으로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 만에 이미 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펄펄 끓는 아스팔트 위로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아버지가 아들의 모자를 꼼꼼히 매만져준다. ‘힘내라’는 듯 아들의 등을 툭하고 친 아버지는 다시 아들과 발맞춰 묵묵히 걷는다.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등에는 ‘강정에 평화를’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어디에서 왔는지 물으니 강정주민이란다. 강정주민 고영진씨(55)는 아들 고민성군(10)과 함께 참가했다. 고씨는 “2007년인가, 처음에는 강정 마을 사람들끼리 해군기지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일주일 동안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행진을 했다”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해 참가했으니 이게 벌써 몇 년째인가”라고 되물었다.

첫걸음은 강정마을 주민만의 것이었다. 답답한 속내를 도민에게 알리고자 강정주민끼리 걸었던 것이 시발점이다. 2012년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강정을 응원하는 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매해 모였고, 올해까지 ‘강정생명평화대행진’이라는 이름 아래 ‘한 명이 걷는 천 걸음이 아닌 천 명이 함께 걷는’ 소중한 행진이 됐다.

고씨는 올해도 5박6일간의 일정을 전부 소화할 생각이다. “마을 사람들은 많이 참가하지 못했다. 생활도 해야 하고, 정부에서 툭하면 강제집행을 하다 보니 많이 위축되기도 했다. 국가에서 주민 말을 안 들어주니 더욱 그렇다. 국가는 강정주민을 국민으로 보기를 포기한 것 같다. 정부의 일방통행, 밀어붙이기를 보면 그렇다. 더 이상은 안 된다. 해군기지 문제,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고씨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1. 2015강정생명평화대행진단이 7월 27일 제주시청을 출발해 5박 6일간의 일정에 돌입했다. 참가자 500여명은 각각 동진과 서진으로 나뉘어 도보로 제주도 전역을 일주한 후 8월 1일 강정마을에서 다시 만났다.
2. 윤용택 제주대 교수가 대행진에 참가해 걷고 있다.
3. 서울에서 여름휴가를 내고 참가한 배준성씨.
4. 팽목항 지킴이 최민석 신부(오른쪽)와 전주교구 김회인 신부(왼쪽)가 휴식을 취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5. 강우일 주교가 7월 28일 동진팀에 합류해 함께 걷고 있다. ? 대행진에 참가한 강정주민 고영진씨와 아들 고민성군.
6. 서귀포시에 사는 전재홍씨(오른쪽)가 지난해에 이어 아들 전도현군(가운데)과 조카 이로빈군(왼쪽)과 함께 참가했다.

당신은 왜 강정을 위해 걷나요?
2015강정생명평화대행진은 7월 27일부터 8월 1일까지 5박6일간 일정으로 진행됐다. 해안마을을 따라 제주도를 한 바퀴 걸어 일주하는 고된 행진이다. 걷는 동안 만난 주민들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해군기지 반대 투쟁’을 알린다. ‘주민 동의 없이 진행된 해군기지 건설, 마을주민과 활동가들에게 끝없이 부과되는 벌금, 사라지는 연산호와 파괴되는 평화의 섬, 미국과 중국 갈등 사이에서 동아시아 화약고가 될 제주 해군기지’ 등 서귀포시 강정동에 건설되는 제주해군기지 문제점을 써넣은 전단지 1만부를 돌렸다.

올해 행진의 주제는 ‘함께 걷자 생명의 강정, 함께 살자 모두의 평화’다. 강정마을회와 제주군사기지 저지와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범도민대책위원회 등이 공동주관하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 전국 92개 단체가 공동주최로 참여했다.

일반인 참가자도 모집했다. 자비로 항공료를 부담하고 6만원의 참가비를 내야 한다. 한여름 땡볕 아래 제주를 걸어 일주하는 행진에 520명이 참가를 신청했다. 강호진 제주범대위 정책팀장은 “지난해 450명이 참가했는데 올해는 더욱 늘었다. 8월 3일이면 제주해군기지 반대투쟁 3000일이 된다. 해군기지에 대한 관심이 꺼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번 행진에는 일반인은 물론 일본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는 평화운동가인 도미야마 마사히로(60), 카모시타 유이치(31·스님)를 비롯해 대만, 필리핀 등에서 활동하는 해외 평화운동가 11명도 동참했다”고 말했다.

행진팀은 27일 오전 10시 제주시청에서 모여 기자회견으로 출발을 알렸다. 이들은 “진실과 평화를 위한 발걸음은 거짓과 완력에 굴하지 않고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4·3의 비극을 경험한 제주를 동아시아 전초기지로 만들 수 없기에 함께 걷는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행진팀은 200명씩으로 나뉘어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출발했다. 동진팀과 서진팀은 각각 하루에 20~23㎞를 걷는 행진을 6일간 계속한 후 8월 1일 강정마을에서 다시 만났다.

행진단은 1시간에서 1시간30분가량을 걷고 30분 쉬는 과정을 반복했다. 제주시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이, 서울에서 ‘강정생명평화대행진’을 위해 왔다는 배준성씨(51·서울)를 만났다. 배씨는 “구럼비 발파로 한창 시끄럽던 2012년에 강정에 간 적이 있었다. 이후 일상에 파묻혀 지내다 반대 투쟁 3000일이라는 소식에 휴가를 내고 행진에 참여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이런 일’에 관심조차 없었던 방관자였다고 했다. “대학 시절에는 오히려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이명박 정부 당시 광우병 촛불시위가 한창인 때였다. 디자인 쪽 일을 하다 보니 업무차 사진을 찍기 위해 집회를 열심히 쫓아 다녀야 했다. 처음에는 ‘왜 저럴까’ 싶었다. 하지만 이유가 있겠다 싶어 관심을 가지니 그동안 사회에 너무 무관심했다는 반성을 하게 됐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강정마을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이번에 제주 내려오자마자 강정마을을 다녀왔다. 강정 주민도, 활동가도 그간 더욱 많은 상처를 받은 것 같다. 하지만 포기는 없다.”

무더위 속에서도 생기발랄한 여대생이 눈에 띄었다. 이민경씨(24·제주대 사회교육과 4학년)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대학생 네트워크인 ‘제주평화나비’ 대표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제주평화나비는 지난해 제주지역 4개 대학 학생 20여명이 모여 결성한 모임이다. 이씨는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었지만 행동하는 방법을 몰랐다. 지난해 선배로부터 동아리를 결성해 보자는 제안을 받고 시작하게 됐다. 이제야 주체적인 대학생활을 하는 것 같다. 전쟁 없는 평화를 염원한다는 점에서 강정 해군기지 문제와 우리의 활동은 같은 선상에 있다”고 말했다. “취업은 걱정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씨는 “지난해 서울 수요집회에 참석했을 때 무관심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저렇게 살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은 또 다른 가해자가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혈기왕성한 우리 같은 대학생이 움직여야 한다.”

“강정, 우리가 함께합니다”
첫날 종착지인 함덕고등학교로 향하는 길, 도심을 벗어났지만 불볕더위는 여전했다. 콧등에 땀방울이 송송 맺힌 남학생 2명이 나란히 걷고 있다. 중학교 2학년인 전도현군(14)과 초등학교 6학년인 이로빈군(12)은 사촌지간이다. 전군은 “지난해에도 아빠랑 함께 참가했다. 걷는 것은 힘들지만 저녁에는 모여 문화제도 하고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도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응원해줄 때면 뿌듯하다”고 말했다. 아버지 전재홍씨(51·서귀포시)는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뜸 “이런 걷기 행사가 1년에 두 번씩, 아니 분기별로 있었으면 좋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런 행진을 통해 강정주민이,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힘없이 쓰러지면 국가는 되레 모른 척하더라. 용산참사, 쌍용차 사태도 마찬가지다. 쓰러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서귀포시에 사는 전씨는 강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2012년 폭파된 구럼비 바위는 전씨가 낚시를 하러 자주 찾던 곳이다. “상처받은 강정주민들 모두 사면받고 잘못된 행정력에 의한 피해도 보상받아야 한다. 해군기지 공사를 무리하게 집행했던 정부관계자, 당시 의원, 지사 모두 잘못을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복된다. 권력의 올바른 집행에 대해 일깨워야 한다. 첫단추를 잘못 꿰면 다시 풀고 새로 꿰어야 하는 것 아니냐. 해군기지가 완공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늦지 않았다. 해군기지를 갈등과 폐해를 몰아낸 평화의 전시관, 학습터, 상징으로 활용할 수 있다.”

경기 의정부 녹양동 성당에서는 40명이 대거 참가했다. 청소년·청년 주일학교 여름캠프를 ‘강정생명평화대행진’으로 대신하기로 한 것이다. 이진원 주임신부는 “강정 해군기지 문제는 공권력에 의해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평화가 깨진 사례다. 그 사이 쌍용차 사태, 세월호 참사 등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처리과정에서 사회가 정의롭지 못함을 보여줬다”며 “아이들에게 정의를 보여주고 싶어 같이 왔다”고 말했다. 팽목항 전담사제였던 ‘팽목항 지킴이’ 최민석 신부도 이번 행진에 함께했다. 최 신부는 “연대는 가난한 이들의 단어다. 평화를 깨는 것은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착취하면서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힘없는 사람들은 연대해야 한다. 연대는 힘없는 사람들의 최소한의 몸짓”이라고 말했다.

강정, 생명평화 운동의 상징으로
첫날 서쪽 행진단과 걸었던 강우일 주교(천주교 제주교구장)가 행진 이틀째인 28일 동쪽 행진단에 합류했다. 강 주교는 “강정생명평화대행진은 강정만의 행사, 단순한 군사기지 반대운동이 아니다. 군사수단에 의한 평화는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많은 이에게 전파하기 위한 전국적인 평화행사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강 주교는 행진 시작 첫해부터 매해 참가해왔다. “지금까지는 군사력에 의한 아슬아슬 균형에 의한 평화였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채 유지만 하는 것이었다. 이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평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온 국민이 고민하는 시대로 전환됐으면 한다. 강정생명평화대행진 역시 그러한 차원이다.”

강정생명평화대행진은 해를 거듭하며 진화하고 있다. 기지 반대운동에서 나아가 생명평화 운동의 상징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윤용택 제주대 철학과 교수(56)는 “강정은 기지 반대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평화 운동의 아이콘이 되고 있다. 강정은 작은 마을에 불과했지만 기지 건설과정에서 훼손된 절차적 민주주의와 공동체를 지키려 했고, 인권유린과 생명 파괴를 알리는 생명평화운동의 중심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행진은 8월 1일까지 계속됐다. 행진이 시작된 첫날 27일 31.1도를 기록한 후 기온은 36도까지 연일 치솟았다. 일부 지역은 폭염주의보까지 내렸다. 다시 만난 전재홍씨는 “괜찮다. 저녁마다 아이들 옷까지 3명분의 옷을 빨아야 하는 게 조금 힘들 뿐”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다른 참가자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강정의 아픔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생 이민경씨도 “되레 어른들이 저희를 기특하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할 뿐이다. 다같이 힘드니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강호진 정책팀장은 “연일 35도를 넘는 폭염 때문에 참가자들의 건강을 위해 일부 구간은 단축하고 있지만 참가자 수는 행진이 계속될수록 오히려 늘었다”며 “200여명에서 출발한 동쪽 행진단은 폭염이 최고조에 달한 3일째 350명까지 늘어났고, 준비한 행사 티셔츠 600개가 모자랐다”고 말했다.

<글·사진 박미라 경향신문 전국사회부 기자 mr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