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호가 만난 사람]정성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신임 이사장

“민주전당 건립 산업화 세력과 함께 추진해야”

“6월항쟁까지는 민주화운동이 우리나라 사회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고 봐요. 그런데 그 후에, 소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좀 문제가 있어. 지나치게 분파적이거나 정파적 사고를 많이 했고, 우리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탁월하게 통합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 했다고 봐요.”

오랜만에 만났으니 하고 싶은 얘기, 듣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평생 많은 사람을 만나 많은 대화를 하지만 끝내 묻지 못하고 답하지 못하는 게 어디 한둘이랴. 어떤 것은 기회가 없어서, 어떤 것은 그렇게 하는 게 적절치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정성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만나 ‘딴 얘기’를 나누었다. 만나기로 한 때와 만난 때의 시간적 간격이 있었고, 그 사이에 중요한 상황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나기로 약속한 때 그는 한국DMZ평화생명동산 및 남북강원도협력협회의 이사장이었지만 만났을 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라는 직함이 하나 더 붙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로 줄임)는 민간단체(NGO)가 아니다. 정부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284개 공공기관 중 행정안전부 산하의 ‘기타공공기관’에 해당한다. 하지만 여느 공공기관처럼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먹히는 데는 아닌 것 같다. 이명박 정부 들어 이른바 ‘좌파 기관장 솎아내기’ 와중에서도 함세웅 이사장이 지난해 12월 무사히 임기를 마친 곳이다. 정 이사장은 지난해 12월 24일 함 전 이사장의 뒤를 이어 제4대 이사장에 올랐다.

기념사업회 안팎에서는 이사장 자리를 놓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정부 측과 이른바 민주화운동 진영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많은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결과는 전혀 거명되지 않았던 정 이사장이었다. 예정된 만남이었지만 다른 얘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다.

여기(기념사업회 이사장실)서 뵙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도 그래요. 여기서 추천을 한다고 해서 못 한다고 그랬지. 이걸 할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 나는 실력이 없어서 강원도 일만도 힘에 버거워.”
정 이사장은 자연스럽게 반말을 섞었다. 희한한 것은 들을 때는 별로 의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글로 적어놓고 보니 그랬다. 우리말이라는 게 묘하다. 반말과 존댓말이 따로 있지만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반말이 존댓말처럼, 존댓말이 반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일을 맡은 셈이네요.
“아, 그건 아니고, 걱정은 했지. 내가 여기 지도위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대강 돌아가는 것은 안단 말이여. 그런데 늘 그렇잖아. 한 다리 건너서 보는 것하고 책임을 지는 입장에서 보는 것하고는 다르잖아요. 그리고 여기가 공공기관이니까 법적으로도 그렇고….”

공공기관이다 보니 기념사업회도 정치적 외풍을 피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어느 정부가 됐든 공공기관의 성격을 강조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사회적 요구나 여기 구성원의 요구는 강한 운동성이야. 그러니까 안 맞지. 전에도 그런 얘기가 나왔는데 한국민주재단으로 이름도 바꾸고 법도 그렇게 정비해서 정권의 향배에 관계없이 민주주의의 토대를 튼튼히 하는 조직으로 가는 게 낫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꽤 있거든.”

기념사업회 문제를 얘기할 때 조직 명칭부터가 대중 친화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특정인을 추모하거나 특정 사건을 기념하는 민간 기구처럼 보이기도 하고, 특정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위원회처럼 한시 기구라는 느낌도 든다. ‘민주화운동’도 ‘기념사업회’도 과거 지향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민주화와 산업화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두 기둥이 아닙니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이 국회를 통과한 지 올해로 10년을 맞았는데 아직 민주화운동에 대한 자부심이 국민적 차원에서 통합되지 못하고 있고, 기념사업회도 민주화의 상징 기관으로 국민 사이에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맞아요. 그건 처음부터 얘기가 된 것이고 나도 여기 지도위원을 하면서 똑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법에 의해 정의된 가장 기본적인 목적이니까 그건 그대로 해야지. 그런데 어제에만 매달려 있으면 안 되고 오늘을 제대로 만들면서 내일을 향해 가야 된단 말이에요. 그게 영 부족하다는 말이지.”

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는 워낙 정리조차 안 된 상태이기 때문에 과거도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치상 그렇지만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연결돼 있어요. 지금 우리 사회가 크게 변하고 있거든. 인류 문명으로 보면 완전히 임계점에 도달해 있다고. 생명의 위기지. 이런 생명의 임계점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민주화운동이란 뭐냐를 생각해야 된단 말이에요. 과거의 독재, 반독재? 그거 아니지. 그 다음에 동북아 정세가 엄청나게 변하고 앞으로도 더 급변을 할 거란 말이야. 잘못 되면 우리가 상상하기 싫은, 말하자면 ‘신분단질서’가 나올 수도 있는데, 민족적으로 엄청난 갈림길에 있는 거란 말이지. 우리가 여기서 정신을 차려서 몇 년을 잘하면 괜찮게 풀릴 거고 몇 년 잘못하면 몇 십 년 또 생고생하게 생겼거든. 이런 시점에 있어서의 민주화운동은 뭐고, 그런 상황 논리 속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뭐냐를 깊이 의논을 안 하면 만날 똑같은 얘기야. 국민하고 관계없는 하나의 기구일 뿐이지.”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민주전당(한국민주주의전당)을 예로 들면 진짜 민주시민을 교육할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인 공간이 돼야 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능하면 민주화세력하고 산업화세력이 같이 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두 세력의 역사적 화해 내지 역사적 통합의 손을 나는 이쪽(민주화세력)에서 내미는 게 좋다고 얘기를 하거든. 저쪽은 아직 내밀기가 곤란할 거야. 우리가 겸손하게 먼저 손을 내밀고 앞으로는 같이 손잡고 가자, 이렇게 해야 진짜 민주화운동이야.”
민주화운동기념관인 민주전당 건립은 10년째 표류해온 사업이다. 이른바 ‘민주정부’ 하에서도 부지 확보에 실패했다. 정 이사장은 두 가지 점에서 깜짝 놀랄 말을 했다. 부지 확보에 강한 자신감을 내비친 것이 그 하나고, 산업화세력과 함께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 다른 하나다. 그는 “내년에 국가시설과 공공시설의 세종시 이전이 시작되기 때문에 올해가 (부지를 확보할 수 있는) 적기”라며 “몇 군데를 놓고 행안부와 얘기를 해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민주화와 산업화의 역사적 화해와 통합을 위해 민주전당뿐 아니라 산업화를 상징하는 기념관 건립도 함께 추진하는 건 혹시 어떨까요.
“글쎄, 나도 지금 하는 생각이 그런 건데, 구상을 해봐야 되겠어. 그런 얘기를 하면 생각하는 국민들은 꽤 좋아하실 거지만 우리 민주화운동 내부가 좀 시끄러울 거야. 자식, 저거 무슨 이상한…(웃음), 역시 촌놈이 수상쩍게 논다, 그럴 거야 아마. 그런데 그런 거 너무 생각하면 일 못 해요. 우리는 정치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웬만한 것 훌홀 털어 치우고 서로 좀 봐주고 그래야 되거든. 부부 사이도 그렇잖아. 마음에 안 들어도 봐주는 거지. 뭐 일일이 다 따지나?”

정 이사장은 평생 운동을 한 사람이다. 이 점에서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딴죽을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늘 운동과 함께 했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다른 운동을 시도했다. 1960년대에는 학생운동, 1970년대에는 반유신운동의 중심에 섰다. 두 차례 투옥된 경력도 있다. 1980년대 6월항쟁의 핵심 주역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90년대부터는 중앙에서의 정치투쟁보다 지역에서의 실천운동에 전념했다. 우리밀살리기운동과 평화생명운동이 그 예다.

내부 비판은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해야 말발이 선다. 그는 민주화운동, 민주화세력에 대해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권력화한 헌 운동을 버려야 한다’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은 개인을 패가망신시키지만 운동 중독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고 드높이는 기관의 장이 된 지금의 입장은 어떨까.

우리나라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드문 사례로 세계가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양쪽 다 공이 크지만 과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과보다 저는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요. 민주화와 산업화는 똑같이 중요한 건데 방법론이라든가 가치에서 서로 충돌했단 말이지.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야. 민주화가 산업화를 촉진하고, 산업화가 민주화를 촉진한 면이 있어. 역사 속에서 크게 압축적으로 하나가 됐다는 말이지.”

민주화운동의 최일선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내부 비판을 하자면….
“6월항쟁까지는 민주화운동이 우리나라 사회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고 봐요. 그런데 그 후에, 소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좀 문제가 있어. 지나치게 분파적이거나 정파적 사고를 많이 했고, 우리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탁월하게 통합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 했다고 봐요. 어떤 사람은 보편성만 가지고 막 떠들고, 어떤 사람은 특수성만 가지고 떠들어. 그건 안 되는 거지. 이를 테면 민주주의가 민족이 하나 되고 민중 생활이 향상되고 모든 생명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면 별 의미가 없는 거거든. 그런데 이거 취재가 아니라 완전히 취조구만.(웃음)”

현 정부 들어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지적도 있지 않습니까.
“의외로 우리 민주주의 토대가요, 잘 아시겠지만 정말 너무 약해. 그냥 민주주의 후퇴, 이렇게 말할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권익 주장은 상당히 잘하는데 민주주의 토대를 튼튼히 쌓고 지키기 위해서 뭘 해야 하는가, 이런 데는 너무 약하다고. 우리 삶의 현장에 가보면 그래요. 이거 부끄러운 얘긴데, 한국이 얼마나 분쟁사회인지 일본하고 비교한 게 있어요. 고소·고발·재판 건수가 일본보다 52배나 많아. 그 8할이 돈에 관계된 것이고. 이 사회가 서로 계급적으로 어쩌고 하기 이전에 엄청나게 분쟁사회란 말이지. 부패도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이런 거야 말로 오해를 하면 안 되는 건데 우리가 정치부패나 관료부패에 대해서는 분개하지만 민간부패에 대해서는 굉장히 너그러워. 민간부패가 그런데 더 심각한 거야. 정권 바꾸면 뭐가 될 것 같지만 안 되는 게 이렇게 민주주의 토대가 약해서야.”

정 이사장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인간사회뿐 아니라 생명사회까지 해당된다. 인간은 모든 생명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개념과 세계관을 기존의 ‘인간사회 민주주의’에서 ‘생명사회 민주주의’로 더 확장하고 심화시켜야 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기후변화 위기, 생명의 위기, 문명의 위기 시대에 민주주의란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우리 민주화운동권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근본적인 걸 덜 생각하고 너무 기본적인 얘기만 한다는 겁니다. 근본적인 것은 인간과 자연의 문제거든. 그걸 바탕에 깔고 민주화운동을 해야 된다는 말이지. 그게 좀 부족한 것 같아. 당은 더하고… 각 당들은 거의 늘 대선 얘기만 하지.”

민주화운동도 시대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는 말로 들립니다. 요즘은 운동권보다 시민사회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어떤 얘기를 하고 싶습니까.
“운동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촛불집회 때 내가 한승수 당시 총리한테 얘기한 게 있어요. 맘에 안 들어도 운동을 백안시하면 안 된다고요. 그러면 그 손해가 제일 먼저 오는 데가 집권세력이니까. 왜냐하면 썩으니까. 자꾸 소금을 뿌려줘야 덜 썩는 거거든. 이런 대전제 하에 시민사회는 뭘 반성해야 하느냐면 시민 없는 시민운동, 다시 말하면 사무실 중심 운동이야. 너무 고소·고발에 의존하는 것도 좋지 않아. 법을 준수하는 게 좋은 것 같지만 그렇게 하면 체제내적인 사고를 계속하게 되는 거야. 나는 운동은 체제를 넘어서야 된다고 생각해. 솔직히 말해서 자본주의? 좋은 게 아니잖아. 깨끗한 사회를 위한 감시·고발운동은 되는데 깨끗한 사회를 직접 만드는 일은 못 하잖아. 직접 만들어야 진짜 운동이지.”

신동호가 만난 사람

보수진영에서는 민주화세력을 좌파라고 부르고 적대하지 않습니까. 민주주의는 이념적 용어가 아닌데 이념 갈등의 요소처럼 돼버렸습니다. 평소 강조해온 ‘내부 통일’과도 관련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념적으로 나눠졌다기보다 정파적으로 나눠진 거지. 이런 거예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 베트남 전쟁 관련 시설물이 많아요. 내가 성공회대 후배 교수한테 들었는데 거기 설명이 잘못된 게 많다는 거야. 확인해 보니 진짜 그렇더라고. 진보진영에서 이걸 지적하면 당장 싸움이 붙지 않겠어요. 그래서 내가 그 지역 재향군인회에 얘기를 했어. 일제가 우리를 어쩌고저쩌고 하면 기분 나쁘듯이 베트남 사람이 그걸 보면 기분 나쁘다, 고쳐봐라 그랬어. 즉 보수세력이 잘못한 건 보수세력이 고치도록 하는 거지. 보수세력 나쁜 놈, 이렇게 전제하면 안 돼. 다 같은 사람이고 견해가 다를 뿐이야. 내 걸 강조하되 강요는 하지 말자, 그런 게 내부 통일 방식이고 현명한 운동이라고.”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