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호가 만난 사람]‘한국판 엘 시스테마’ 송쥴리 대전영어뮤지컬센터 대표

“작품이 끝나면 아이들이 완전히 달라져요”

어린 시절 사나운 개에게 돌을 던진 기억을 떠올려 보자. 돌이 날아가면 개는 화들짝 꽁무니를 빼고 달아난다. 돌이 공간을 이동해서 개에게 위협을 가하는 현상을 인간이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예수가 태어나고도 1600년이 더 걸렸지만 그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뉴턴 역학을 몰라도 약간의 운만 따른다면 내가 던진 돌이 개를 정확하게 맞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동호가 만난 사람]‘한국판 엘 시스테마’ 송쥴리 대전영어뮤지컬센터 대표

2011년 1월 11일 오후 11시쯤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1자가 7개나 들어가는 날의 시간에 그를 만났다. 대전문화예술의전당 아트홀 무대 뒤에서였다. 첫 만남이지만 인터뷰해야겠다고 속으로 결정했다. 개에게 돌을 던지는 평범한 행위 속에 고전물리학의 놀라운 체계가 담겨 있듯이 그의 활동과 삶 속에 한국의 보통사람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특별한 의미가 숨어 있을 것 같아서다.

송쥴리 대전영어뮤지컬센터 대표. 그는 미국인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완전히 미국 사람이 됐다. 한국에서 25년, 미국에서 그 두 배 가까운 47년을 살면서 초·중·고등학교 교사 생활만 35년을 했다.

1964년 도미해서 2006년 방한할 때까지 43년 동안 한 번도 모국을 찾지 않은 것을 보면 의도적으로 한국을 멀리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날 그가 연출한 영어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별난 공연이었다. 3000원에 판매한 900석 전석이 매진됐다. 이 브로드웨이 대작을 감동적으로 연기한 주인공은 뜻밖에도 아마추어, 그것도 중·고등학생들이다. 이들은 영어 대사와 노래는 물론 춤과 연기까지 완벽하게 소화하면서 오케스트라의 음악에 맞춰 150여분 동안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들은 영어를 잘해서 뽑힌 학생들이 아니었다. 영어를 잘 읽지도 못하거나 발음이 엉망인 아이, 영어 공부에 아예 손을 놓은 아이, 다시 말하면 대전 변두리 주택가의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방치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교육의 잣대로 ‘루저’가 될 수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자신감과 꿈을 심어준 감동 스토리들이 생각났다.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 남수단의 ‘톤즈 브라스밴드’, 영화 <시스트액트2>에 나오는 우피 골드버그의 합창단…. 미국 국적의 칠순 넘은 할머니의 열정이 만들어낸 이날 무대는 ‘한국판 엘 시스테마’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기적의 뮤지컬’이었다.

“초등학생도 있고 대학생과 성인도 자원봉사 차원에서 일부 참가를 했어요. 하지만 대부분이 대전 변두리 공부방의 중·고등학생이에요. 주인공 테비에 역을 한 사람은 17살짜리 고등학교 2학년생이거든요.”

지난 1월 19일 서울 종로구 교남동 현대사기록연구원(이사장 송철원)에서 다시 만난 송 대표의 설명이다. 인터뷰는 그의 남동생인 송 이사장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그는 43년 동안 한국과 담을 쌓고 산 사람 같지 않게 자연스럽게 우리말을 구사했다.

기자는 주인공 역을 한 고등학생과 비슷한 나이일 때 같은 제목의 영화로 국내 개봉된 이 작품을 본 적 있다. 수염이 더부룩한 노인(그때는 노인이라고 생각했다)이 부르던 ‘트러디션(Tradition)’이라든가 ‘선라이즈 선셋(Sunrise, Sunset)’ 등의 선율과 가사가 조각조각 기억에 남아 있다. 그 나이에 제대로 이해하면서 감상하기도 쉽지 않은 작품인데, 무대에 올라가 직접 공연하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싶었다.

학생들은 학기 중에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을 텐데, 얼마나 연습을 했습니까.
“지난해 7월에 오디션을 해서 배역을 정했으니까 5개월 정도 한 거죠. 제일 큰 문제가 주연자들이 주로 고등학생이다 보니까 토요일밖에 시간이 없잖아요. 그것도 놀토(노는 토요일)가 아니면 시간이 들쭉날쭉해요. 주인공의 경우에는 자기네들이 학교에다 얘기해서 야자(야간 자율학습)를 하루 이틀 빼서 했고요.”

어떤 학생을 캐스팅 대상으로 삼았습니까.
“공부방 아이들이에요. 저소득층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갈 데가 없으니까 모아서 저녁도 먹이고 공부도 시키는 곳 있잖아요. 지역아동센터라고 그러죠. 대전 지역아동센터 세 군데와 교회에서 주로 뽑았고, 걔네가 데려온 학교 친구들도 있어요.”

주로 사교육의 혜택을 누리기 어려운 아이들이군요.
“집이 가난하거나 결손가정이거나 편부모 환경이 많죠. 이번 출연자는 주로 양부모가 있지만 다 일을 하다 보니까 교육적으로 방치되다시피 한 아이들이에요. 그래서 뮤지컬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같은 목적을 가지고 모여서 함께 하는 게 너무 좋은 거예요.”

43년 동안 한국과 담을 쌓고 지냈고, 미국 국적을 갖고 있으며, 가족도 미국에 두고 있는 송 대표가 2008년 2월부터 아예 대전으로 이사를 한 것이 바로 뮤지컬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그가 처음부터 뮤지컬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 우연히 음악에 빠져든 그는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뜻을 거역하고 이화여대 음대(작곡과)를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의 꿈은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뉴욕주립대 음악대학원에 입학한 그는 베트남 전쟁 등으로 교사 수요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진 그 당시 상황 덕분에 쉽게 교사 자리를 얻었고 영주권까지 받았다.

“초등학교에서 2년 근무하다 중·고등학교로 옮겼는데 청소년을 상대하는 게 제 적성에 딱 맞았어요. 뮤지컬을 하게 된 동기가 미국에서는 학교 홍보 수단이 음악과 스포츠 프로그램밖에 없잖아요. 음악은 합창, 오케스트라, 관악 세 부문이 있었는데, 제가 합창을 맡았어요. 합창을 이용해서 할 수 있는 게 뮤지컬이니까 그걸 시작한 거죠. 미국에서는 뮤지컬을 하기가 아주 쉽거든요.”

그 사이에 결혼해서 가정도 꾸렸고, 부모님도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게다가 미국 생활과 교사 직업에 만족했기 때문에 그는 한국을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35년 교직에 몸담다가 1999년 평소 꿈꾸던 신학과 교회음악 공부를 하기 위해 은퇴를 하게 된다.

그가 한국 땅을 다시 밟은 것은 어머니가 세상을 뜬 뒤 아버지가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면서다. 2006년 10월의 일이다. 그 뒤부터 한국에 올 기회가 자주 생겼다. 2007년 여름 그가 다니던 한인교회에서 한인 2세들을 인솔해 한국으로 영어 캠프를 가기를 권유했다. 남대전장로교회 강형문 목사와의 인연이 그렇게 해서 맺어졌다.

“한국 저소득층 아이들을 그때 만났어요. 남자 아이는 택시운전사, 여자 아이는 미용사가 되는 게 꿈인 동네였죠. 그 직업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다른 꿈을 가질 수 없는 환경이 안타까웠던 거죠. 그들을 위해 일하는 과정에서 강 목사와는 (뜻과 성격이) 잘 맞았어요. 앞뒤를 생각하지 않는다든가 일단 일을 저지르는 게 저와 비슷했거든요. 강 목사가 한국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도 가르치고, 목회도 도와달라고 해서….”

마침 국내에 영어 교육 붐이 일었다. 원어민 강사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뛰었다. 그는 강 목사의 권유로 대전에 터를 잡고 아이들을 모아 영어를 가르쳤다. 그들에게 영어가 가장 필요했고, 그가 잘할 수 있는 것도 영어였기 때문이다.

“한 학기 영어를 가르치고 방학 때 미국에 들어갔다가 일이 있어서 좀 늦게 나왔어요. 이미 2학기 중간이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마땅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한 게 뮤지컬이었어요. 한국 아이들이 노래를 잘하잖아요. 마침 크리스마스도 가까우니까 교회 공연용으로 45분짜리 <크리스마스 캐롤>을 준비하게 되었어요.”

생각지도 않던 영어 뮤지컬을 시작한 게 주효했다. 우선 아이들이 좋아했다. 엉터리 발음이었지만 서로 하겠다고 나섰다. 형편없는 실력으로 무슨 뮤지컬이냐고 반신반의하던 학부모들도 직접 와서 보고는 놀라워했다.

“영어가 어려운 것은 무엇보다 두려움 때문이에요. 뮤지컬은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자신감을 갖게 해줘요. 아이들이 함께 연습을 하다 보면 그 가운데서 리더도 나오고 협동심도 생겨나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변해요. 껄렁하던 아이, 부모 속을 썩이던 아이, 불량기 넘치던 아이의 태도가 겸손해지고 정서적으로도 안정을 찾는 모습이었어요. 한 작품이 끝나면 완전히 다른 아이가 되더라고요.”

첫 무대인 2008년 크리스마스 공연이 좋은 반응을 얻자 다음해에는 규모를 더 키웠다. <스크루지>를 두 번째 작품으로 선정해서 대본 라이선스를 받고 의상도 원작에 맞게 미국에서 구입했다. 공연 장소도 교회를 벗어나 440석 규모의 대전연정국악문화회관으로 진출했다. 무대 설치비, 진행비 등 1000만원이 넘는 공연 비용 대부분은 그의 개인 호주머니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두 차례 공연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그는 대전 중구 옥계동에 전용 연습장을 마련하고 거처도 그쪽으로 옮겼다. 본격적인 뮤지컬을 무대에 올리고 싶었다. 그래서 대작인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선택했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음악과 안무가 다른 뮤지컬과는 너무 다르고 독특해요. 음악 자체가 유태인 선율이고 내용도 세대 간의 갈등을 다루면서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이잖아요. 처음 연출한 분이 미국에서 유명한 안무가인 재롬 로빈스인데, 독특하게 연출해놓고 뒤에 공연할 때도 꼭 그대로 하라고 했어요. 음악 편곡뿐 아니라 매뉴얼이 굉장히 잘 돼 있고, 대사가 짧아 아이들이 외우기가 쉽거든요.”

3시간 반짜리 작품을 그대로 무대에 올리기가 어려워 2시간 반으로 줄이기는 했지만 결코 만만치 않았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노래, 안무 전문가가 필요했고, 무대 설비 등 비용도 두 배나 더 들었다. 무대 설비는 강 목사가 직접 제작하고 노래와 안무를 도와주겠다는 자원봉사자도 생겼다. 이런 주변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2000여만원이 들어갔다. 그 대부분을 그는 사비로 충당했다.

지난해 12월 4일과 5일 대전시청 대강당에서 막을 올린 세 번째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틀 동안 600석 전석이 꽉 찼고, 관람객에게 깊은 감동과 감탄을 안겨주었다. 출연한 학생들은 어른들도 하기 어려운 공연을 해낸 데 대해 강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게 됐다. 송 대표는 “20년 전 미국에서 이 작품을 했는데, 미국 아이들보다 훨씬 잘 했다”며 만족해했다.

이 공연으로 대전영어뮤지컬센터는 전국적인 유명세를 갖게 됐다. ‘영어뮤지컬로 희망을 공연하다’ ‘꿈과 희망으로 피워 올린 감동의 무대’ 등의 제목으로 중앙 언론에 보도됐다. 대전문화예술의전당은 이 작품을 전문가들이 서는 무대인 ‘2011 윈터페스티벌’ 작품으로 선정했다. 지난 1월 11일 공연은 그에 따라 예정에 없던 공연을 한 것으로서, 그에게는 또 한 번 1000만원 가까운 출혈과 미국에 있는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을 희생시킨 것이었다. 물론 충분히 그럴 가치는 있는 것이지만.

사비를 털어 영어 뮤지컬을 계속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텐데요. 정부의 지원이나 기업 등의 후원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물론 필요하죠. 절실하죠. 정부 지원은 쉽지 않아요. 예당(대전문화예술의전당) 공연 때 200만원 지원받기로 했는데 아직 나오지 않네요.(웃음) 영어 뮤지컬이 뜨니까 어떤 단체 같은 데서 찾아오기도 해요. 학원을 만들려고 접촉하는 사람도 있고요. 이걸 상업적으로 키우려고 하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아요.”

한 국제학교에서 그에게 교장 제의를 하기도 했다. 영어와 우리말 구사가 완벽하고 글로벌 교육 경력을 가진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국제학교 아이들보다 대전의 어려운 아이들이 자신을 더 필요로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별 연고도 없고 반향도 덜한 대전을 고집하는 까닭이 뭡니까.
“왜 하필이면 대전에 가서 하느냐고 미국 교포사회에서조차 얘기를 해요. ‘서울에서 그런 작품을 하면 부모들이 돈 싸갖고 와서 도와줄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그래요. 사람이 사는 목적이 뭐냐고….”

취지가 좋은 만큼 영역이나 범위를 확대하는 것도 좋은 것 아닙니까.
“영어 뮤지컬이 아시아에서는 선교의 틀이 되기 때문에 대학생 중심으로 소규모 뮤지컬을 했으면 해요. 초등학생은 영어 공부를 목적으로, 청소년은 꿈과 자신감을 키우기 위해… 이렇게 연령별로 확대하고 싶어요. 이번에 예당에 올라가 보니까 지역적으로 확대해나가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요. 상업적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미국 교육자의 눈으로 본 우리 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그는 “청소년들이 너무 학교에 묶여 있다 보니까 문화생활, 가정생활도 없다”며 “그 점에서 우리가 하는 사역(성경적 용어로 선행을 뜻함)이 작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말했다.

신동호가 만난 사람

한국의 복잡한 교육시스템과 무관하게 평생 교편을 잡았던 그의 한 마디를 들으면서 글머리에 언급한 개를 떠올린다. 사나운 개가 으르렁거리고 있다. 돌을 집어 든다. 개를 겨냥해 힘껏 던진다. ‘뉴턴의 돌’과 ‘송쥴리의 돌’ 가운데 어느 것이 개를 더 정확하게 맞힐 수 있을까.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