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가족관계,이제는‘혈연보다 애정’

부계 혈통 위주의 가족만 ‘정상’으로 칭하던 시대는 갔다

호주제를 폐지하고 가족관계등록법을 시행한 것은 우리 민법에서 ‘코페르니쿠스적’전환이다.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로 가족애를 표현해왔다. 일면 타당한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혈연관계가 아닌 이들에 대한 지극히 배타적인 우리의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 지금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고 하지만 고아수출국 1위라는 부끄러운 자화상이 이러한 관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 진하다는 혈연관계 속에 딸, 아내, 며느리 등 여성의 혈연은 인정하지 않았던 ‘호주제’로 대표되던 가부장적 관습의 모순은 어떠한가?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성들이 주로 찾는 포털의 게시판에는 명절을 앞둔 결혼한 외동딸들, 딸만 있는 집의 안타까운 하소연을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러한 관습 아래서 결국 물보다 진한 피라는 주장은 단지 부계 혈통의 유지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지금까지 이와 같은 부계 혈통 중심의 관습을 법제화한 호주제 아래에서 우리는 호주와 어떤 관계인지로 자신을 설명해왔다. ‘호주의 처’ ‘호주의 모’ ‘호주의 자’ 이런 식으로 ‘호주의 누구’로 나를 설명해온 것이다.

호주제 폐지해도 아무 문제 없어
하지만 호주제를 폐지하고 가족관계등록법을 시행하기 시작한 올해부터 우리는 ‘나’를 중심에 놓고 나와의 관계로 다른 가족들을 설명해야 한다. 이는 우리 민법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우리는 이제 호적 대신 개인의 ‘기본증명서’가 생겼고, 가족관계는 나를 중심으로 한 ‘가족관계증명서’에 기재되며, 혼인·이혼관계는 ‘혼인관계증명서’에 그리고 입양이나 친양자 입양은 각각 ‘입양관계증명서’와 ‘친양자관계증명서’에 나타난다.

물론 이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실제 가족관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호주제 폐지 논쟁이 거세던 때, 호주제 존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호주제를 폐지하면 가족관계가 무너질 것이라고 이야기해왔다. 호주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가족관계등록법을 시행하고 있지만, 이로 인해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던 가정이 호주제가 없어짐으로써 파탄이 났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호주를 인정하느냐에 따라 가족 구성원이 진정한 애정과 신뢰로 묶여 있는지, 서로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크고 작은 갈등을 해결할 방법을 가지고 있는지 등이다.

지난해, 영화 ‘가족의 탄생’을 인상 깊게 보았다.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딸이 홀로 남아 지키고 있는 집, 어느 날 오래전 집을 떠났던 남동생이 아내를 데리고 나타난다. 남동생은 물론이고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지만 철 없어 보이는 그의 아내, 누이는 당황스러웠다. 그런 저런 일상이 계속되지만 역마살이 있는 듯 남동생은 어느 날 또 다시 아내와 누이를 남겨둔 채 훌쩍 떠나버린다. 한 남성을 사이에 두고 시누와 올케라는 이름으로 묶였으나 아직은 어색하기만 한 두 사람 사이에 올케가 전 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딸아이까지 합세한다. 하지만 서로 연민을 나누며 함께 보낸 시간은 도저히 어울릴 수 없어 보이는 이 세 사람을 가족으로 묶어준다.

영화에는 이 가족뿐 아니라 상식에서는 조금 벗어나 보이는 다른 가족 이야기도 등장한다. 일례로 불치병에 걸린 철없는 엄마를 보살피고 또 그 엄마가 다른 사람과 혼인하여 낳은 남동생을 거두는 딸의 이야기다. 줄거리만 보면 상식적인 인륜이나 혈연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속칭 ‘콩가루 집안’의 얘기다.

하지만 이들 가족은 때로 다투기도 하고 서로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흔히 ‘보통’이라거나 ‘정상’이라고 표현하는 어느 가족에게서나 볼 수 있는 일이고 이들 역시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의지하고 서로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준다. ‘가족의 탄생’이다.

혈연으로 묶여 있다 해도 반목하고 질시하고 때로 혈연이기에 더욱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가족도 있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인격적 만남을 통해 오로지 애정과 헌신으로 평생 사랑을 나누며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가족도 있다. 여기에 정상이니 비정상이니 하는 섣부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폭력일 따름이다.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현할 때 쓰던 “호적에서 빼버리겠다”는 말은 새로운 가족관계등록법을 시행하면서 이제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비슷한 경우로 불가능한 일을 염두에 두고 다짐할 때 쓰던 “내 성(姓)을 간다”는 말도 이제는 적절치 않다. 호적이 없어졌고, 거의 불변(不變)이나 다름없던 성과 본(本)도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바꿀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진정한 양성평등 세상 열어가야

지난해 10월 19일 국내 최초로 부자보호시설인 ‘인천아담채’가 개관했다. 이 시설은 지상 4층 규모로 부자가정 20가구 6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나’를 중심에 놓은 새로운 가족관계등록법의 시행이라는 시대적인 변화를 바르게 읽어야 한다. 여성들은 부조리와 불평등의 굴레를 벗어나게 되고 남성들도 소중한 개인의 삶을 돌아보는 가운데 의무와 책임을 나누는 여성과 남성, 아내와 남편이 진정한 양성평등, 부부평등의 세상을 열어가기를 희망한다.

성과 본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자녀의 성을 바꾸겠다는 요구가 말 그대로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그 바람이 절실하다는 점은 익히 알던 바이고 또 정말 필요했던 사안이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이는 그간 우리 민법이 사회와 가족상의 변화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일이다.

자녀의 성을 바꾸겠다는 것은 물론, 서른이 넘은 자신의 성을 변경하고 싶다는 요구도 있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한 사람 한 사람 사연을 들으면 모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일들이다. 다만 이혼하고 내가 키우고 있으므로 남편의 성이 아니라 엄마인 내 성을 붙여주고 싶다는 감정에 덧붙여 자녀를 낳고 키운다는 것은 의미와 책임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현재 우리 사회는 관습적으로 부계 혈통 위주의 가족만 ‘정상’이라고 칭하던 비정상의 상태에서는 상당히 벗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과 우리 어머니, 할머니 세대만 해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람과 혼인하여 평생을 해로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요즘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혼인이 그러하듯 우리 가족관계도 혈연을 가장 중시했던 데서 벗어나 신뢰와 애정, 뜻과 의지라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가사분담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가정 내에서 여성, 남성의 역할도 좀 더 유연한 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유쾌한 변화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변화를 유쾌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변화의 흐름을 바르게 읽고 나 자신을 존중하는 한편 타인과 타인의 삶을 존중하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하며, 아울러 삶에 대한 책임과 권리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곽배희<한국가정법률상담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