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지금, 왜, 주몽인가

자주성·카리스마 갖춘 캐릭터 대리만족… 경제불황 속 탁월한 CEO 능력에도 열광

드라마 주몽이 인기를 얻은 데는 외적 요인이 크다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 사진은 드라마 주몽의 주요 등장인물.

“방송 8회 만에 시청률 30% 돌파’ ‘주몽 세트장 여행상품 등장’ ‘주몽 관련서적 서점가 점령’….

MBC드라마 ‘주몽’ 열풍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8월 넷째주 평균시청률 40%대(AGB닐슨 리서치)의 벽을 깨며 여름 휴가철 한풀 꺾였던 인기를 단박에 회복한 주몽. 이제 주몽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드라마 제목을 넘어서 2006년 중반을 달구는 키워드로 떠올랐다.

주몽이라는 인물에 왜 이토록 열광하는가. 전문가들은 “주몽은 이제 단순히 고구려를 건국한 신화 속 인물이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분야에서 또 다른 화두를 던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사실 드라마에는 시대상황에 따른 대중적 욕구가 담기게 마련이다. 1980년대 말 드라마 ‘모래시계’와 ‘인간시장’은 당시 급격하게 번지던 민주화 열기와 함께 사회악에 대한 반감을 다뤄 큰 호응을 얻었다. 마찬가지로 1990년대 트렌디 드라마는 탈이데올로기화되어가는 젊은이의 일상을 반영했다.

방송 3사 모두 고대사 드라마 기획

반면 요즘은 사극이 안방극장을 장악하고 있다. 미디어평론가 변희재씨는 “최근 방송가에선 로망스를 다룬 드라마가 쇠퇴하고 사극 중에서도 대장금 같은 소프트 사극이 빛을 잃고 고대사를 다룬 것들이 호응을 얻는다”며 “이는 민족의 뿌리를 찾고 자긍심을 회복하자는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소득 2만 달러 시대로 가느냐, 장기 불황의 나락으로 빠지느냐’는 갈림길에 놓인 대중심리, 청년실업과 가계부도 등 국민적 고통이 가중되는 현실,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의 불안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변씨는 ‘과연 나라가 버틸 수 있을까’ ‘이젠 어떤 지도자가 와도 안 된다’는 좌절감의 반영이라고도 해석했다.

이같은 시류 속에서 KBS는 최근 발해사를 다룬 드라마를 기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몽’(MBC) ‘연개소문’(SBS)에 이어 지상파 3사가 모두 고대사를 앞세워 안방극장 공략에 나서는 것이다.

주몽의 스토리는 현실 정치와 맞닿아 있는 뉘앙스를 주고 있다. 드라마 속 극적 전개에서 주몽은 금와왕의 친자인 대소, 영포 두 왕자와 ‘대권’을 놓고 한판 대결을 벌인다. 하지만 자신이 억울한 죽임을 당한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안 뒤 홀연 대권경쟁을 포기한다. 그리고 보다 큰 정치적 야심-고구려라는 대제국 건설을 가슴에 품고 옛 고조선 유민을 규합해 국가를 건설한 뒤 영토확장 전쟁을 통해 고토를 회복한다. 여기서 정치인 주몽의 매력이 드러난다. ‘자주’와 ‘카리스마’라는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상과도 일맥상통한다.

전반부 거리감 없는 캐릭터 주효

하지만 변희재씨는 주몽을 막연한 영웅주의의 틀 안에서 해석하는 것을 경계했다. “이는 박정희 신드롬과는 분명 다르고 오히려 드라마 주몽에선 히어로(영웅)의 개념이 사라졌다”는 설명이다. 해모수를 만나기 전까지 약하고 천방지축인 주몽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 단적인 예다. 반면 주인공을 완벽한 영웅으로 묘사한 드라마 ‘연개소문’은 황금시간대에도 불구하고 시청률 20% 안팎으로 상대적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주몽 관광상품과 서적에서 음식점까지. 다양한 주몽관련 상품이 우리 사회에 등장했다. <경향신문>

또 ‘주몽’이 뜨는 이유 중에는 경제적 불황기라는 측면이 작용했다는 견해도 있다. ‘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의 저자인 지용희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목숨 바쳐 조직을 살리고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며 도전정신을 지닌 채 카리스마로 부하들을 이끄는 게 역사 속 영웅의 리더십“이라고 분석했다. 물론 드라마 속 주몽도 이같은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비록 픽션이 가미된 드라마 속 주인공이라지만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다.

주몽은 CEO로서의 능력도 탁월하다. 한나라의 무역제재로 궁핍해진 백성들의 삶을 해외 원정을 통한 소금산 개척으로 해소했고 모팔모와 같은 훌륭한 대장장이를 영입해 한나라의 그것과 다름없는 철제무기를 개발했다. 난적이던 신녀 여미을을 자기편으로 만든 것도 타고난 협상가요 지략가로 묘사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주몽은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드러낸다. 박희제 경희대 교수(사회학)는 “초반부터 영웅스럽고 무게감 있는 것도 아니다”며 “그런 거리감 없는 캐릭터로 시작해 끌고 나간 게 사회적 반감을 줄였다”고 말했다. 사료가 많지 않아 작가가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고 이로 인해 ‘영웅 없는 영웅이야기’가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박 교수는 또 “사실 급격한 세계화 속에서 국민이 한껏 주눅 들어 있고 여기에 국내 경제불황과 청년실업 등이 맞물려 침체된 정서에 주몽의 얘기는 대리만족을 가져다줬다”고 분석했다. 대국인 한나라와 대결하며 한사군을 쳐부수는 장면에선 묘한 사회적 카타르시스까지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 교수는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정치화돼 있어서 모든 것을 정치에 꿰어 맞추려 하는 과잉정치가 가져온 폐단이 있다”며 주몽을 현실정치에 빗대는 것은 회피했다.

최근 주몽 열풍은 얼핏 이전 이순신 열풍과 여러 정황에서 흡사하다. 방송과 언론이 분위기를 몰아가고 여러 관련 문화상품이 파생되는 것 등이 그렇다. 하지만 명백히 다른 점도 있다. 이순신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서 한민족의 운명을 되살려낸 성웅이라면 주몽은 신화 속에서 잠자다 21세기 벽두에 되살아난 고구려 건국의 시조라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순신은 ‘난중일기’ 등 기록으로 고증된 인물이지만 주몽은 지금도 각종 설에 휩싸일 만큼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지용희 교수는 “이런 점에서 이순신과 달리 주몽이라는 인물을 평가하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허상 속 주몽을 놓고 열풍에 휩싸인 것은 최근 영화 속 실체 없는 ‘괴물’에 전 국민이 열광하는 심리와 맥을 같이한다고도 볼 수 있다. 최근 방송가에선 일부 호사가들이 주몽을 놓고 다양한 정치적 해석을 내놓고 있다. 한 스포츠신문 방송담당 기자는 “일부 방송인과 네티즌은 극중 금와왕을 노무현 대통령에, 사사건건 왕을 견제하고 왕권에 도전하는 왕비와 왕자, 신료를 수구세력에 비유한다”고 전했다.

<오상도 기자 sdo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