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3500 대 220.
2013년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의 남녀 숫자다. 남성이 98% 이상, 여성은 2% 미만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광복운동은 오롯이 남성들의 몫이었을까.
서대문형무소 역사박물관에서는 8월 한 달 동안 매주 토요일 여성 독립운동가와 관련한 세미나가 열린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이는 국회에서 최초의 여성 정무위원장을 역임한 김희선 전 의원이다. 김 전 의원은 지난 3월 여성독립운동기념회의를 발족하고 위원장으로서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과 재조명, 그리고 기념사업 관련 일로 바쁘다. 올해는 유독 가슴 아픈 일들로 광복절조차 쓸쓸하게 치러지는데, 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회의 위원장을 만나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와 한국 정치인들에 대한 쓴소리를 들었다.
여성독립운동기념회의는 어떤 계기로 만들었나요.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문익환 목사 기념사업회 일도 하고,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등과 어울려 공부 모임을 해왔어요. 그런데 어느날 이덕일 소장이 일제 식민지 시절 독립운동의 상당수가 가족 단위로 이루어졌는데, 우리가 기억하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왜 유관순 한 분뿐이며, 다른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묻혀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보더군요. 그리고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들의 남녀 비율이 98대 2라는 것도 알려줬습니다. 그분이 권하는 책을 읽고 자료를 보는데 분노와 송구스러움이 겹쳐 온몸이 뜨거워졌습니다. 당장 제주도에 계신 이효재 선생(전 이화여대 교수)을 찾아가 여성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일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너무 늦었지만 정말 중요한 일’이라며 격려해주셨어요. 기념사업회의 취지를 설명하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최윤정·최선경·홍소연·손희영 실행위원들이 3월 창립대회를 준비해 치렀고, 모두 생업을 미뤄둔 채 상근하다시피 일을 돕고 있습니다.”
왜 우리들은 여성 독립운동가라면 유관순 열사만 기억할까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덕분이겠지요. 그분도 물론 훌륭한 분입니다만 더 치열하게 광복운동을 한 여성도 많습니다. 일제 때 광복 투쟁에 나선 사람은 남자들만이 아니었죠. 조마리아 선생처럼 광복운동가를 뒤에서 뒷바라지한 어머니나 아내도 있었고, 더러는 직접 항일투쟁 대열에 참가한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들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은 거의 지워지다시피 했거나, 빛바랜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우선 그들의 삶을 제대로 조사하고 기록하는 이가 없었고, 또 그들의 활동을 제대로 현창하는 기념사업회도 하나 없었기 때문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해방 이후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을 폄하하고 무시한 것이 주요인이죠.
남편이나 아들이 광복운동을 하면 아내나 어머니 역시 그들의 일을 도왔습니다. 광복운동가의 부인, 어머니, 할머니, 며느리로서 광복군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생활을 보살폈던 여성들의 삶은 ‘뒷바라지’라는 이름으로 평가절하돼 묻혀버리고 전혀 광복운동으로 인정받지도 못했어요. 1940년 9월 중국 충칭에서 창설돼 30여년간 항일 무장투쟁을 이어간 여성 광복군이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금책이나 첩보활동을 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발자취는 역사에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업적은 대부분 기록이 없어요. 그저 구전으로 내려오는 경우가 많아요. 그 당시 누가 사진을 찍고 일지를 쓰거나 녹음을 했겠습니까. 구전으로 전해오는 말들의 조각을 모아 퍼즐 맞추기를 할 필요가 있어요. 저도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자랐는데 어린 시절에 할머니 등 친척들로부터 들은 얘기들이 다시금 떠올랐답니다. 동네 여인들이 광복군의 버선을 수선하면서 손가락에 굳은 살이 박인 사연이며, 닭을 잡아 얻은 노란 기름으로 광복군들의 녹슨 총기를 닦고 고기로는 백숙을 해먹였다던 얘기 등 다시 곱씹어보니 그 여성들도 모두 광복운동에 참여했던 내용이었어요.”
그럼 너무 광범위해져 자칫 여성 독립운동가의 숫자만 늘리는 운동같이 보일 수도 있는데요.
“이 사업회의 목적은 절대 남성과 여성의 대립이 아닙니다. 여성 독립운동가가 적으니 숫자를 늘려달라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의 특징과 시대상을 잘 파악해서 그들의 진정한 공로를 되찾아주자는 겁니다. 현재 등록된 남성 독립운동가가 1만3000여명인데요, 그들 모두 가정이 있어요. 쉽게 말하면 남성들은 광복운동의 최전선, 1선인 셈이고, 여성들은 2선이나 3선이죠. 당시 농경사회라 여성들은 농사 짓고 시부모 봉양하고 자녀 양육을 하면서도 군자금을 모으러 다니고, 치마 속에 서류나 선언문을 감추었다 뿌리고, 총알 등의 군수물자를 다른 짐인 것처럼 보자기에 싸서 운반했어요. 여성들의 가사노동을 인정하듯 여성들의 이런 공로도 인정해주자는 것입니다.
특히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를 연구해보면 도처에 여성 안중근이 많아요. 동풍신씨의 경우 1919년 3월 함경도 길주의 화대장터에서 독립 만세를 부른 소녀입니다. 장터에 모인 군중이 만세를 부르자, 일본 경찰들은 마구 총을 쏘아 장터 일대는 피바다가 되었답니다. 그때 일본 경찰이 겨누고 있던 총구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서 총탄에 죽은 아버지를 들쳐 업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자, 일본 경찰은 ‘미친 소녀’라 하여 총을 쏘지 않고 사로잡았습니다. 함흥 재판소로 잡혀간 동풍신은 ‘만세를 부르다 총살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만세를 불렀다’고 말할 뿐 갖은 고문에도 애국심을 굽히지 않다가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에 대한 자료가 A4용지 한 장에 불과할 뿐이고 북한 출생이라 많은 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남자현 열사의 경우도 독립운동가인 남편이 죽자 자신이 직접 61세, 손주까지 둔 할머니의 몸으로 조선총독을 암살하겠다며 남편의 피묻은 옷을 입고 총알 8알을 장전한 총을 들고 나섰다가 밀고로 붙잡혔어요. 이들 모두 묻힐 수밖에 없는 이들인데,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이 증명을 해줘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전국 곳곳을 돌며 ‘우리 할머니가 이런이런 일을 했다더라’ ‘우리 고모할머니는…’ ‘우리 동네 누구 어머니가…’ 등의 구전을 다 모아서 퍼즐 맞추기를 해야 합니다. 현재 정부로부터 독립유공 서훈을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는 모두 223명인데 유관순 열사 등 한두 명의 유명 인사를 빼고는 이름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거든요. 항일 광복투쟁사 가운데 사각지대가 바로 ‘여성 독립운동사’ 분야라고 할 수 있죠. 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심사 때 작성한 ‘공적조서’를 능가하는 인물연구나 행적조사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인데, 우리 사업회가 그 사각지대를 재조명하는 일을 할 겁니다.”
그런데 왜 지금 새롭게 여성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는 일을 합니까.
“역사를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앞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 아베 정부의 행태를 보세요. 우리에게 미소를 짓지만 중국의 동북공정은 또 어떤가요. 이제라도 광복운동은 크고 작은 다양한 힘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임을 환기시키고, 앞으로 이뤄야 할 자주·민주·통일의 길도 그렇게 모두가 힘을 모아야 이룰 수 있음을 알려나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광복운동의 개념을 다시 잡아야 합니다. 뒷바라지라는 말을 없애야 해요. 먹고 자고 입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지 뒷바라지가 아닙니다. 항일투쟁의 근본도 먹고 자고 입는 것이지요. 본질적 토대 위에서 남성과 여성이 같이 광복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날 발굴해내고 새롭게 해석해야 합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세미나 외에 어떤 일을 할 계획입니까.
“기념사업회는 과거를 기리는 것입니다. 제가 올해 71세인데 벌써 제가 했던 일, 제 이야기가 과거, 역사가 되어가고 있어요. ‘여성의 전화’ 발족 당시에 제가 우리집 전화를 가져다 달았는데 벌써 30주년이라며 저를 찾아왔더군요. 과거를 기리는 것은 현재 어떻게 해야 과거의 그 역사를 잘 발전시키는 것인지, 미래를 어떻게 내다보아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역사 왜곡, 교과서 왜곡 문제 등 현재적 의미의 이야기를 같이해야 합니다. 그것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것이겠지요. 우선 우리나라 각 지역과 중국 지린성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사업을 준비 중입니다. 각 지역에서 여성 독립운동가를 찾아 그 삶을 기리고 후손을 찾아 격려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바르게 산 사람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올바른 대우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줘야죠. 복원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영화나 만화로도 제작할 계획입니다. 아울러 이 사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연구소와 기념관 건립 추진과 함께 여성 독립운동 스토리텔러 양성, 유적지 답사, 청소년을 위한 여성 독립운동사 교육 등 교육사업에도 매진할 생각입니다. 평생 제가 몰두할 광맥, 보물상자를 발굴한 기분입니다.”
국회의원 시절, 국회에서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을 발족·주도해 친일파 명단도 공개하고, 또 친일규명법 개정에도 앞장섰지만 가짜 독립운동가 후손이란 지적을 받기도 했지요.
“그 법안은 반민특위 같은 연좌제도 아니고, 억울한 후손을 괴롭히자는 게 아니에요. 먹고 살기 위해 친일할 수밖에 없던 민생친일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자기 의지로, 한민족임을 부정하며 한국인을 괴롭혀 사리사욕을 채운 이들을 확인해서 그들을 반성케 하고, 그들이 축재한 재산을 환수하자는 것입니다. 가까운 역사조차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니까 일본은 교과서를 왜곡하고 중국도 고구려사를 저렇게 마음대로 하잖습니까. 친일역사는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친일했던 이들은 여전히 기득권을 누리고 잘 살고,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보상조차 제대로 못받고 그늘에 살잖아요. 그런데 친일파 후손인 보수언론에서 뭐가 찔렸는지 절 계속 괴롭혔지만 무시했습니다.”
16·17대 국회의원 시절에 정말 투사처럼 활동했는데 다시 정치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지금도 전 정치를 합니다. 다만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국회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합니다. 국회의원 선거할 당시에 ‘저는 여러분을 떠날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약속을 지키느라 국회의원 그만두고도 지역구를 떠나지 않고 계속 같은 사무실을 쓰고 동대문의 큰이모로 지역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요가 교실을 운영하며 직장인들을 위한 새벽 수업도 하죠. 표를 구걸하는 것도 아니니 제 진정성을 알아줍니다. 용산, 쌍용자동차 등의 모임에도 계속 참여해 현수막이라도 제 손으로 잡습니다. 얼마 전에는 도로를 불법점거했다고 150만원 벌금이 나왔어요. 그런데 국회의원 배지에만 관심 있던 이들은 배지 떼면 지역구도 떠나고 정치에도 무관심하더군요. 모든 일은 현장에 있고, 꼭 국회의원만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요즘 정치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한심하다’, ‘큰일났다’, ‘희망이 안 보인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순서는 다르지만 이런 말을 합니다. 도대체 정치인들에게 시대정신이 안 보여요. 아직도 우리나라의 시대정신은 자주·민주·통일입니다. 정치는 조정과 통합으로 국민에게 행복을 주는 것인데 정작 국민이 뭘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대중이 갈등하는 곳에 꼭 정치인이 있어야 하는데 안 보이더군요.”
그런데 왜 정치인들은 항상 싸우고 투쟁만 하는 것처럼 보일까요.
“정치는 투쟁이 기본입니다. 정치인들은 더 열심히 싸우겠다고 선언해야 해요. 물론 그 투쟁이 자기 밥그릇을 챙기거나 보스를 위한 싸움박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흔히 정치를 흙탕물에서 피어나는 연꽃에 비유하는데, 작금의 정치는 그저 흙탕물이에요. 솔직히 현재로선 새누리당이 훨씬 정치를 잘합니다. 혁신위원회를 만드는 등 적절한 거짓말도 하고 위협도 하고…. 그런데 새정치민주연합은 도무지 선장이 누구고 어디로 가려는 배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2선을 하는 동안 새정치국민회의, 민주당, 열린우리당, 대통합민주당 등 당명이 네 번이나 바뀌었지만 그래도 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는 소신은 있었거든요. 다들 당 간부나 계파 수장만 바라보지 국민은 안 보는 것 같아요.”
정치권에 쓴소리를 하면서도 칠순의 김희선 위원장은 ‘여성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라는 평생 일거리를 찾은 기쁨에 소녀처럼 즐거운 표정이었다. 우리 정치인들이 정치를 김 위원장처럼 즐겁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 물론 밥그릇 챙기는 정치 말고, 투쟁의 현장에서 진짜 연꽃을 피우는 정치 말이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