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보호무역주의 강해진다

미국·유럽연합·중국 등 자국 IT산업 보호 위해 데이터 유출 제한

스웨덴의 스카니아 트럭은 주행할 때 차량 내의 센서들이 집계한 속도, 연료 사용량, 엔진 성능과 같은 데이터를 스웨덴 본사에 보낸다. 이 정보는 차량 관리에 도움을 주는 서비스로 개발이 되기도 하고, 스카니아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추가돼 차량 제조공정을 개선하는 데 이용된다. 경제의 모든 영역이 정보집약적으로 변하면서 석유 및 가스 같은 중공업도 데이터 중심으로 변모하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독일기후컴퓨팅 센터에서 한 직원이 장비를 점검하는 모습. / 게티이미지 @Morris MacMatzen

정보통신기술(ICT)이 전방위적으로 산업에 결합하면서 데이터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컨설팅업체인 맥킨지 글로벌 인스티튜트는 2015년까지 지난 10년 동안 전세계 총생산이 10% 증가했고 그 중 3분의 1에 데이터가 기여했다고 추정했다. 전통적인 무역은 크게 성장세가 줄었지만 구글·페이스북·아마존 등 IT 공룡들의 성장과 함께 국경 간 디지털 흐름은 급격히 증가했다.

‘데이터 현지화’ 조치 10년 간 3배 증가

그러나 IT 공룡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자국 IT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데이터 유출에 빗장을 거는 보호조치가 각국에서 늘고 있다. 유럽의 싱크탱크인 국제정치경제센터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자국에서 생산된 데이터의 역외 유출을 제한하는 ‘데이터 현지화’ 조치가 2016년까지 지난 10년간 세계 주요 경제권에서 31개에서 84개로 거의 3배 증가했다.

유럽연합, 중국을 중심으로 데이터 보호주의 조치가 강해지고 미국도 보호주의로 기울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정부는 이전 오바마 정부가 주도해 결성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했다. TPP는 일종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다자 간 자유무역협정으로, 참여국 간의 자유로운 데이터 이동을 보장한다. 미국은 캐나다, 멕시코와 함께 세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내에 강력한 데이터 이동 조항을 넣을 계획이지만 TPP에 복귀하지 않는다면 그 영향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은 역외 개인정보 이전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내용 등이 담긴 일반개인정보보호법(GDPR)을 지난 5월 25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개인정보를 취급하는 기업들이 이 규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경우 최대 전세계 연간 매출의 4%를 벌금으로 내야 한다. 다만 유럽연합은 상대국이 유럽연합과 동등한 수준의 개인정보 보호체계를 갖췄다고 인정하는 적정성 평가를 받거나 기업이 그와 비슷한 절차를 거친 경우에는 개인정보 역외 이전을 허용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을 필두로 브라질, 칠레 등 남미국가들과의 적정성 평가를 추진하면서 유럽연합 주도의 일종의 ‘데이터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하고 있다.

물론 유럽연합이 GDPR을 도입한 배경을 데이터 보호무역주의 하나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사생활 보호에 대한 요구가 강하다. 독일의 경우 동독시절 비밀경찰의 감시에 대한 반감이 강해 엄격한 사생활 보호법에 대한 지지여론이 높다. 많은 유럽연합 국가들은 역내 개인정보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GDPR이 시행되기 전에는 다른 회원국으로의 개인정보 이동을 막았다. 결국 유럽연합의 전략은 역내 데이터 이동은 자유롭게 해 데이터 산업을 육성하고, 역외 데이터 이동은 엄격히 제한해 미국 IT기업들의 영향력 확대를 막겠다는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곳은 중국이다. 중국은 자국민의 개인정보를 자국 서버에 보관하도록 하는 네트워크 안전법을 내년 1월부터 시행할 계획이다. 외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반드시 서버와 데이터 센터를 현지에 설치해야 하기 때문에 부담이 커지게 된다. 네트워크 안전법을 위반할 경우 최대 50만 위안(약 8400만원)을 내야 한다. 이 법은 지난해 6월부터 시행될 예정이었지만 한국·미국을 포함한 외국계 기업들의 반발로 법 시행이 1년 반 유예됐다. 서기만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중국에서 중국 사람을 대상으로 장사하려면 중국 안으로 들어와 사업하라는 이야기”라며 “구글이나 페이스북으로부터 중국 업체를 보호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데이터 현지화 조치의 명분은 개인정보 보호다. 그러나 실상에서는 자국 IT산업 육성을 꾀한다는 점에서 보호무역조치에 가깝다. 글로벌 IT기업들이 국경의 제약 없이 인터넷 서비스를 하면서 세금도 안 내고 고용도 하지 않고 과실만 따먹는 걸 막겠다는 의도도 있다. 윤재석 한국인터넷진흥원 개인정보협력팀 팀장은 “자국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겠다는 측면도 있지만 자국의 자생적 산업을 보호하고 자국 개인정보로 다른 나라 기업이 부가적인 영리를 취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속내가 있다”고 말했다.

데이터 보호주의 흐름 속 한국 대응책은

거대 경제권이 취하는 데이터 보호주의에 대항해 한국이 취할 방책은 그리 많지 않다. 최대한 규제를 준수하면서도 실리를 챙겨야 하는 상황이다. 윤재석 팀장은 “협상과정에서 예외를 인정받는 등 기업들이 피해보지 않고 대응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유럽연합으로부터 연내 정보통신망법 상의 부분 적정성 평가를 받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부분 적정성 평가를 받게 되면 온라인으로 흐르는 정보를 자유롭게 국내로 들여올 수 있게 된다. 김상광 행정안전부 개인정보보호정책과 과장은 “상품·서비스로만 무역분쟁을 하는 게 아니라 데이터도 무역분쟁의 시대에 들어갔다”며 “개인정보 반출을 강하게 규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루빨리 정보통신망법 상의 부분 적정성 평가를 통과시키기 위해 전부처가 협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이 유럽연합이나 중국·미국과 같은 데이터 보호주의 흐름에 합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신중론이 나온다. 지리정보의 국외 반출이 안 되는 등 국내도 데이터 보호주의 조치가 적지 않다. 정부로서는 국내 산업 보호와 소비자 후생 보호라는 양 방향에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서기만 수석연구위원은 “데이터 보호주의 조치를 할 경우 국내 기업들을 보호할 수는 있지만 소비자 후생 측면에선 나쁠 수 있다”며 “국내 이용자들이 글로벌 IT기업들의 서비스를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하게 될 경우 당장 반발이 거셀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영재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jy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