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배터리 ‘리튬 전쟁’ 불붙어

수요 급증하자 중·일 발빠르게 대비… 전량 수입하는 한국은 아직 걸음마

3월 31일 경기 일산 킨텍스에서 시작된 서울모터쇼는 자동차의 무게중심이 친환경차로 이동했음을 각인시킨 자리였다. 친환경차 가운데 소비자들에게 가장 바짝 다가선 차종은 전기차다. 서울모터쇼에서 한국지엠 부스를 찾은 시민들은 국내에서 가장 긴 주행거리를 인증받은 순수 전기차 쉐보레 볼트 EV를 만날 수 있었다. 한 번 완전충전으로 서울과 대전(약 160㎞)을 왕복하고 10㎞를 더 달릴 수 있다.

전기차의 심장은 ‘배터리’다. 한 번 충전으로 얼마나 주행할 수 있는지가 성능의 바로미터가 됐다.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의 전기차 출시 경쟁이 한층 뜨거워지면서 전기차 배터리의 고출력화는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젠 기존 배터리 업체뿐만 아니라 테슬라나 BYD(비야디), 폭스바겐 등 자동차 업체까지 배터리 사업에 뛰어드는 추세다.

그 어느 때보다 배터리 시장 규모가 확대되고 있지만, 배터리의 핵심 원료인 ‘리튬’이 발목을 잡고 있다. 리튬 가격이 급격히 오른 가운데 공급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리튬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야말로 ‘리튬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2017 서울모터쇼에서 공개된 쉐보레 볼트 EV. 순수 전기차인 볼트 EV는 한 번 충전으로 최대 383㎞까지 주행할 수 있다. / 한국지엠 제공

리튬 가격 폭등, 배터리 공장 설립 늘어

‘하얀 석유’로 불리는 리튬은 전기차뿐만 아니라 스마트폰과 노트북의 배터리, 유리 제조, 윤활유 첨가제 등 다양한 곳에서 활용되는 희소 자원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금속원소 중 가장 가볍다 보니 같은 공간에 많은 양을 넣을 수 있다. 다량의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높은 출력을 얻어야 하는 전기차에 적합하다. 무엇보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자가 방전이 적고 수명이 길어 각광을 받는다. 리튬은 전 세계 매장량의 75%가 소금광산에서, 나머지는 광석에서 추출되며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 칠레는 리튬 트라이앵글이라고 불릴 정도로 매장량이 풍부하다. 미국과 중국, 호주 역시 주요 리튬 생산국이다.

2015년 톤당 5500달러 수준이던 배터리용 리튬 가격은 지난해 상반기 중국 현물시장에서 4배가 뛴 톤당 2만2000 달러(약 2460만원)에 거래됐다. 현재 리튬 가격은 지난해 상반기 대비 3배나 폭등했고, 5년 전에 비하면 무려 6배 이상 올랐다. 리튬 가격이 급상승한 것은 전기차 수요 급증으로 배터리 생산량이 늘면서 리튬 수요도 덩달아 증가했기 때문이다.

전기차 개발에 적극적인 업체들로서는 가격경쟁력을 갖춘 고출력 배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들이 배터리 공장 설립에 뛰어들게 된 이유다. 현재 세계 최대 자동차 배터리 공장은 테슬라가 세운 기가팩토리다. 지난해 7월 공정률 14%에서 가동을 시작한 이 공장은 3년 뒤 완공되면 전기차 46만대에 탑재할 수 있는 50GWh 규모의 배터리를 생산할 수 있다. 가동률을 최대치로 올리면 150GWh까지 늘릴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배터리 업체로 시작해 전기차로 영역을 넓힌 중국 업체 BYD는 자국 최대 리튬 매장지인 칭하이에 10GWh 규모의 전기차용 배터리 공장 건설을 추진 중이다. 파나소닉에 이은 세계 2위 배터리 생산업체인 이 회사는 기존 배터리 공장 2곳에 이은 칭하이 공장 신설로 전기차 생산에서 테슬라를 압도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폭스바겐은 테슬라가 기가팩토리에 투자한 금액보다 2배가 넘는 100억 유로(약 12조860억원) 규모의 배터리 공장 건설을 추진 중이다. 2025년 양산체제를 구축해 전기차 10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배터리를 생산할 계획이다.

세계적인 리튬 수요 급증에는 중국이 한몫 했다. 중국 정부는 2014년부터 대기오염을 개선하기 위해 전기차에 막대한 보조금을 주고, 버스를 전기차로 교체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특히 버스는 승용차보다 훨씬 많은 배터리 양이 필요하다 보니 배터리나 원료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다.

중국의 리튬 확보 의지는 확고하다. 지난해 리튬 수출량을 전년 대비 40%나 줄였고, 올해도 줄일 것으로 전망된다. 심지어 중국 업체들은 남미나 호주, 아프리카까지 손을 뻗쳐 리튬 광산 개발에 참여하거나 리튬 생산업체의 지분까지 공격적으로 사들이며 원재료 확보에 힘을 쏟고 있다. 이에 중국이 리튬 생산뿐만 아니라 완제품 제조에 이르기까지 시장을 장악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리튬 확보 못하면 전기차시장서 도태”

일본의 대표적인 자동차 기업 도요타와 혼다도 일찌감치 대비책을 마련해 왔다. 코트라 도쿄무역관에 따르면 도요타는 리튬 수요 증가를 예측해 미리 생산거점을 확보하게 되면서 리튬 가격이 급상승한 지금 비교적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10년 전 도요타는 향후 자동차 생산에 영향을 미칠 자원으로 리튬을 꼽았다. 전기차에 필요한 모터와 배터리에 희토류와 리튬이 사용되고 그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측한 것이다. 이에 그룹 내 종합상사인 도요타통상은 발빠르게 움직여 2012년 아르헨티나 북서부 개발 허가를 얻었고, 호주의 광산회사 오로코브레와 합작회사를 설립해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공급을 시작했다.

혼다는 ‘재활용’에서 활로를 찾았다. 향후 배터리 조달이 쉽지 않을 것이며 리튬이온 배터리가 산업폐기물로 처리돼 폐기비용 등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해 2015년 리튬이온 배터리의 재활용 기술 개발에 착수한 것이다. 코트라 관계자는 “‘도시 광산’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재활용에 대한 의식과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혼다의 재활용은 배터리 조달과 처리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대책”이라고 설명했다.

일찌감치 리튬 선점에 나선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한국은 걸음마 단계다.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은 얼마 전 포스코가 광양제철소 내 전기차용 고순도 리튬 생산설비를 갖춘 게 그나마 위안거리가 됐다. 현재 포스코가 생산하는 리튬은 연간 2500톤 수준에 불과하다. 포스코 관계자는 “현재 협의 중인 리튬 생산 파트너와의 교섭이 잘 진행되면 2020년에는 적어도 2만톤 규모, 2022년에는 4만톤 규모의 리튬 공장이 가동될 것”이라고 말했다.

리튬 공급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다면 전기차 시대는 그만큼 늦게 도래한다. 포스코경영연구원에 따르면 리튬이온 배터리의 주요 소재인 니켈, 코발트, 망간은 가격은 오를 수 있어도 물량 확보는 가능하다. 반면 리튬은 생산품 대부분이 소비되고 있어 재고 자체가 부족한 상황이다.

호주 투자은행 맥쿼리는 2020년쯤 리튬 수요(26만1000톤)가 공급(23만7000톤)보다 많아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원자재 가격 정보 업체 플래츠도 2020년이 되면 리튬 수요(32만톤)와 공급(32만1000톤)이 비슷할 것으로 내다봤다.

더 큰 문제는 전기차 시장만 리튬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IT 기기용 배터리나 세라믹·그리스·유리·폴리머 등 산업용 리튬 시장도 매년 2~4%씩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게다가 리튬 사용량이 많은 대용량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도 빠르게 성장 중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리튬이온 배터리를 대체할 차세대 배터리나 신소재, 또는 리튬 추출과 관련한 획기적 기술 개발 가능성은 현재로선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영일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은 “리튬을 세라믹 등으로 대체하는 기술이나 해수 추출 공법 등도 꾸준히 연구되고 있지만 상용화까지는 아직 많은 격차가 있다”며 “리튬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이므로 리튬 확보를 둘러싼 전기차 업체와 배터리 업체들의 경쟁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동차업계 한 관계자는 “전기차 충전소 등 인프라 확충도 시급하지만, 장기적으론 저렴한 리튬을 지속적으로 확보하지 못하면 전기차 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고영득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god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