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의 한국은행, 청와대 ‘남대문 출장소’?

금통위원 7명 중 5명이 친정부 인사…금융통화정책 독립성 훼손 우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은행의 정체성인 독립성과 중립성을 지킬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한국은행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과 제도적 개선이 요구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 | 강윤중 기자

우선 한국은행의 위기는 통화금융정책의 최고의결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에서 비롯되고 있다. 금리와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금통위 위원들의 역학구도가 정부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금리 등 통화정책의 결정에 있어 중앙은행의 독립성보다는 정부의 입김이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민간 추천도 정부 내정 견제기능 퇴색
한국은행법(제13조)에 따르면 금통위원 7명 가운데 한국은행 총재와 부총재가 당연직 위원이고 나머지 5명은 한국은행,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은행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각각 추천해 대통령이 임명하고 있다. 금통위원을 여러 외부 기관의 추천을 통해 선발하도록 법률로 정한 이유는 위원들 상호 간의 적절한 견제와 균형을 통해 통화금융정책이 독립적으로 결정되도록 하자는 것이 목적이다. 특히 민간기관인 은행연합회와 대한상의를 추천기관으로 명시한 것은 민간 금융단체를 대표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중립적인 인사를 추천받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같은 법 취지가 최근 들어 무너지고 있다. 은행연합회는 지난 4월 15일 현직 정부 관료인 임승태 금융위원회 상임위원을 추천했으며, 이명박 대통령은 즉시 임 상임위원을 금통위원으로 임명했다. 은행연합회는 통상 복수추천하던 관행과 달리 이번에는 단수추천했다. 특히 민간단체에서 현직 관료를 금통위원으로 추천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에 앞서 은행연합회는 4월 12일 임승태 상임위원 추천을 보도자료로 배포함으로써 이 대통령의 임명(4월 15일)을 기정사실화하기도 했다. 배경태 한국은행 노조위원장은 “청와대에서 임명도 하기 전에 은행연합회는 임 상임위원을 추천했다는 보도자료를 냈다”면서 “이는 청와대가 임 상임위원을 임명할 것이라는 것을 은행연합회가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임 위원은 재정경제부 총무과장과 금융정책국장, 금융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대한상의도 4월 24일로 임기가 만료된 박봉흠 위원의 후임으로 기획재정부 출신의 전직 고위 관료를 추천할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연합회와 대한상의에 금통위원 추천권을 준 것은 해당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을 쌓은 민간인을 추천하라는 것이 한국은행법 상의 취지다. 그러나 민간단체 몫의 금통위원은 정부가 사실상 내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는 “금통위원을 청와대가 선택할 때 모피아(기획재정부 관료들)의 의사가 전달된다”면서 “금통위원의 추천은 청와대와 모피아의 의견조율 결과물이다”고 말했다.

위원 임기 4년 정부 입김 쉽게 노출
나머지 금통위원은 당연직인 한국은행의 김중수 총재와 이주열 부총재, 김대식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한국은행 총재 추천), 최도성 서울대 경영대 교수(금융위 위원장 추천), 강명헌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기획재정부 장관 추천) 등이다. 이 가운데 강명헌·최도성 교수는 친MB(이명박)계 학자로 분류된다.

강 교수는 지난 대선 후 대통령직인수위 자문위원을 지냈으며, 이 대통령의 싱크탱크였던 바른정책연구원에서 금산분리와 출자총액제한제 완화 등 기업지배구조 분야 공약을 만들기도 했다. 최 교수도 경제·금융정책과 관련해 이 대통령에게 수시로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시절 서울시 시정자문위원(경제분과)에 참여한 경력도 있다. 이에 따라 금통위는 기획재정부, 금융위, 은행연합회, 대한상의에서 추천한 친정부 인사 4명으로 채워졌다.

여기에다 “한국은행의 독립성은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을 말하는 게 아니다”고 강조한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를 포함하면 금통위원 7명 가운데 5명이 친정부 인사가 된다. 이 때문에 앞으로 금통위가 금리 결정을 포함한 전반적인 통화금융정책을 결정할 때 정부의 의중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 여기에 올해부터 기획재정부 제1차관이 금통위 회의 때마다 ‘열석발언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정부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이혜훈 의원(한나라당)이 한국은행을 상대로 질의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한국은행 금통위가 매파를 몰아내고 친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비둘기파가 장악할 것이라는 견해는 김중수 총재가 취임하면서부터 예견돼 왔다. 비둘기파·매파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유래됐다. 금통위 내에서 비둘기파는 경제 성장을 우선으로 하는 정책 담당자로 친정부 인사를 말하며, 매파는 물가 안정을 우선으로 하는 정책 담당자로 정부의 성장 주도 정책에 브레이크를 거는 인사를 총칭한다. 협의 기구인 금통위에서 금리 결정 등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상황에서 위원들끼리 의견이 3대3으로 맞서면 한국은행 총재는 캐스팅보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 초대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낸 김 총재는 “한국은행도 정부다. 한국은행이 정부 정책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발언하는 등 지나치게 정부와의 협조관계를 강조해 왔다.

이와 관련해 시민단체인 경실련은 “김 총재가 이 대통령 측근으로서의 태도보다는 국민경제를 위해 때로는 대통령의 뜻도 거스를 수 있는 용기 있는 자세로 임해야 한국은행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촉구했다.

경제 운영의 두 축인 정부(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은 운명적으로 서로 간의 견제와 균형을 위해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즉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부는 경제 정책에 있어 성장에 우선 순위를 두고 가능한 한 정책 금리를 낮은 수준으로 묶어 두려고 하는 반면에 한국은행은 앞으로 닥칠 경제 상황을 판단해 금리를 미리 인상하는 등 물가 안정에 초점을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과거 다른 선진국의 예를 보면 중앙은행이 금리정책을 지키지 못해 국가적 재앙을 불러온 사례가 종종 있다. 일본의 경우 1985년 플라자 합의(G5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의 모임에서 발표된 환율에 관한 합의) 이후 엔고 불황을 완화하기 위해 일본 중앙은행은 장기간 저금리 정책을 유지하는 등 지나친 금융완화 정책을 실시해 버블경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일본 중앙은행이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지 않고 정부의 경제정책을 지원한 것이 향후 ‘잃어버린 10년’으로 대변되는 장기 불황의 시발점으로 작용한 것.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경우 정보통신(IT) 버블이 붕괴된 2000년대 초반 당시 우리의 금통위와 같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6.5%였던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인 1.0%까지 낮추며 경기 부양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상환 능력이 의심되는 사람들에게까지 ‘묻지 마 부동산 대출’이 행해지면서 잠재적 부실이 양산되고, 결국 2008년 하반기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부동산담보대출) 사태가 발생했다. 여기에서 미국발 금융 위기가 전 세계로 몰아닥쳤다.

이에 대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이혜훈 의원(한나라당)은 “우리 경제가 글로벌 금융 위기를 극복하고 앞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 한국은행의 독립성 확보가 요구되고 있다”면서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직결되는 금통위 구성의 견제와 균형이 심각하게 무너지는 상황을 직접적인 당사자인 한국은행은 수수방관만 할 것이 아니라 독립성을 지켜 낼 적극적인 노력과 장치 마련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와 함께 금통위원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제도적 보완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우선 4년 임기인 금통위원 임기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짧다는 지적이다. 이는 5년 임기의 대통령이 자기 임기 동안 금통위원을 모두 교체할 수 있다는 폐단과 연결된다. FRB 이사의 임기는 14년이다. 즉 대통령 중임 임기인 8년보다 훨씬 오랫동안 임기를 보장함으로써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미국은 7명의 이사들을 홀수 해에 한 명씩 순차적으로 바꾸도록 함으로써 대통령 임기 4년 동안 두 명 이상 교체할 수 없도록 했다. 이와 관련해 이성태 전 한국은행 총재도 “금통위원이 한 번에 너무 많이 바뀌는 것은 문제가 있다”면서 “금통위원의 임기를 더 늘리고 1년에 1명씩 바꾸도록 하는 것이 통화신용 정책의 안정성을 위해 좋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시민단체에도 추천 권한 부여해야”
금통위원에 대한 검증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현재처럼 대통령이 임명하는 금통위원을 국회에서 인사청문회 등을 통해 검증하자는 안이다. 미국은 상원 청문회의 검증을 거쳐 FRB 이사를 임명한다. 이와 함께 은행연합회와 대한상의에서만 행사하는 민간인 몫 추천을 시민단체 등에도 할당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은행연합회와 대한상의가 민간을 대표한다고 볼 수 없으며, 통화금융 정책은 일반 국민들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시민단체도 이해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현재 ‘김중수 한국은행호’ 앞에는 2008년 금융 위기로 인해 각 분야에 투입한 재정에 거품이 끼지 않도록 출구 전략을 세우는 시점 선정과 한국은행법 개정을 통한 금융감독권 강화 등 한국은행의 위상 강화라는 두 가지 책무가 놓여 있다. 시장은 금리 인상과 관련해 결정기구 수장인 김중수 총재의 입을 주시하는 것이 아니라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등 정부 고위관료의 입에 더 주시하고 있다. 또한 한국은행에 제한적 금융기관 조사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한국은행법 개정안이 기획재정부, 금융감독원, 금융위원회 등 정부의 협공에 밀려 좌초될 위기에 처해 있다. 김홍범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은행은 지난 2년여 동안 글로벌 금융 위기 상황에서 정부와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협조관계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면서 “한국은행은 금리 인상 등 선제적 정책으로 중장기적 시각에서 금융통화 정책을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라 불리던 한국은행의 오욕의 역사가 반복될지 주목된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