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연중기획]현대건설 ‘이명박 과장’ 역할은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경부고속도로 착공 당시 담당 업무는 중기사업소 관리

"기업에 들어가서 첫 고속도로 공사에 참여했을 때 매우 실용적인 생각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중략)… 박 전 대통령은 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있던 나에게 ‘조국이 근대화되는데 이 도로가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독일에서 봤다, 고생스럽지만 좀 잘해 달라’고 말했다.”(2007년 11월 12일 경북 구미 박정희체육관에서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발언)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정주영 현대건설 명예회장 등이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기념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과거 대운하, 4대강 사업 등을 거론할 때 자주 자신의 경부고속도로 건설 경험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선도적 리더십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현대건설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했을 때 어떤 일을 했을까. 우선 그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를 보자. 이명박과 고속도로 건설의 인연은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로부터 시작한다. 당시 경리사원이었던 이명박은 한국에서 온 인부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금고를 안고 버틴다. 드라마로까지 만들어진 유명한 일화다. 그럼에도 현대는 이 공사에서 막대한 적자를 기록한다. <신화는 없다>에 따르면 상관인 과장과 부장은 본국으로 소환되고, 이명박은 대리로 승진해 관리부장과 경리과장 역할을 떠맡는다. 입사해 채 2년도 안되는 시기였다.

4대강 사업 거론 때마다 당시 경험 강조
1968년 3월에 귀국한 이명박 대리를 정주영 사장은 서빙고에 있는 현대건설 중기사업소의 관리과장으로 발령냈다. 그때의 느낌을 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중략)…내가 노른자위에 앉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던 사원들도 의아해했다. ‘이명박 그 친구 잘나가더니 끝난 거 아냐?’라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한 번 더 생각한다. “대졸관리사원이 장비를 접할 기회는 거의 없다. 나를 그쪽으로 발령 낸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가서 배우자.”

이 대통령의 인생을 따라다닌 ‘불도저’라는 별명은 이때 나왔다. 제때에 불도저를 수리하지 못해 정주영 사장으로부터 호통을 맞던 이명박 관리과장은 아예 불도저 한 대를 몽땅 분해했다가 재조립한다. 나아가 분진으로 말썽을 빚는 옆 업체의 도로를 불도저를 몰고 나가 파내기도 한다. 청와대와 현대 본사의 항의도 못들은 척했다.

현대건설이 발간한 공식간행물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이명박 관리과장의 역할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신 정주영 사장의 일화는 자세히 언급된다. 비가 하늘에 구멍이 난 듯 쏟아진 어느 날 비옷도, 장화도 없이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나타난 정주영 사장은 현장소장에게 대전 시장에 가서 장화 한 켤레를 사오라고 한다. 정 사장의 발은 꽤 컸던 모양이다. 12문짜리 이상을 사 오라고 주문했지만 장화가 없었다. 결국 그날 정 사장은 비에 젖은 맨발로 지프를 타고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경향신문사가 1982년에 발행한 <거탑의 내막>이라는 재벌 비화를 다룬 책에서도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이 대통령의 역할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 책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휘하는 정주영 사장의 애증 섞인 ‘욕설’이 일부 나와 있다. 주로 정 사장의 욕설 상대가 되는 사람은 정태수 당시 현대건설 상무와 <신화는 없다>에서 ‘왕상무’로 칭하던 김영주 한국프렌지 명예회장이다. 정주영 사장은 왜 그리 경부고속도로 현장을 다그쳤을까.

경부고속도로 공사 중 최대 난제 구간이었던 당재 터널. 충북 옥천군 동이면 우산리와 청성면 묘금리를 연결하는 터널로, 서울 기점 180.7㎞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김영주 한국프렌지 명예회장은 나중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사실 그게 사람을 잡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그때 건설부장관이 이한림 장관인데 늦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보고를 받았을 것 아닙니까? ‘당신들 분명히 각오해. 일정 변경은 절대 있을 수가 없어. 정주영 회장도 가능하다고 해서 잡았는데 단 하루라도 개통식 날짜가 늦어지면 각하 모시고 하늘에서 헬기로 준공식을 할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 줄 알지? 너희 회사 문 닫아야 돼!’ 명예회장님이 언제 가능하다고 했어요? 자기네들이 잡아 놓고. 그렇지만 막 공갈을 치고 그러니 명예회장님인들 아무리 배짱 좋고 유들유들해도 개통을 늦출 수가 있어요? 굉장히 당황했지요. 그래 가지고 아예 공사현장에서 살다시피 하셨어요.”(LA 중앙일보,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 중 김영주 인터뷰)

1970년 7월 7일이라는 개통목표일을 잡아 놓고 충북 옥천군 ‘당재터널’ 구간은 막판 고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거탑의 내막>은 당재터널 공사에서만 4명의 인부가 죽었다고 밝히고 있다. 책에 따르면 터널 입구에 서 있던 거대한 느티나무에 붙어 있는 신령이 노한 탓이라고 인부들은 믿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군인이 나섰다. 공교롭게도 느티나무 제거 작업을 진두지휘한 중령은 바로 이튿날 차량 사고로 대전에 있는 병원에 입원한다. 책에 따르면 터널 입구까지 놓인 임시다리(가교)도 무려 열한 차례나 유실됐다.

세종시 수정 추진과 고속도로 건설 ‘닮은 꼴’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두고 머리를 맞댄 것은 주로 박정희와 정주영이었다. 적어도 앞의 유세에서 주장한 박 대통령과 이명박 ‘과장’의 만남은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신화는 없다>에서 이 대통령은 당시 자신과 박 대통령의 관계에 대한 과장된 소문이 있었다고 말한다. 박 대통령이 뒤를 봐준다는 소문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박 대통령을 만난 건 10·26 엿새 전인 1979년 10월 20일이다. 신문사 사장, 새마을 지도자 등과 함께였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주선한 이 자리에 대해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은 “각계를 망라한 ‘국민의 대표’들과 대통령이 대화를 갖는 자리였다”고 술회한다. 차지철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진언을 암송하라고 시킨다. “저는 과거에 6·3데모를 주동한 운동권 출신으로서 오늘의 학생들 사태를 보건대, 그들의 생각이 아주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부마사태는….” 적어둔 대로 말하는 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거역하자니 회사가 크게 다칠 것 같아 진퇴양난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이 자리는 사전 각본에 따라 진행됐다. 다행히도(?) 앞에서 외우던 새마을 지도자가 더듬거렸고, 박 대통령도 눈치를 채고 중단시킨다. 이명박 사장 바로 앞에서 ‘국민과의 대화’가 끝난 셈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나는 진땀 속에 진행되던 ‘국민과의 대화’를 새삼 떠올리면서 보좌역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했다. 만일 보좌관들이 대통령을 올바로 보좌했다면 10·26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됐든 세종시나 4대강 추진과 경부고속도로 추진은 닮은 점이 한 가지 있다. 국회의 승인이 나기 전에 공사부터 강행했다는 점. 박정희 정권의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이 대통령은 어떤 교훈을 끌어내려 하는 것일까. 시사평론가 김용민씨는 “도·농 간에 격차가 벌어지고 사회간접자본의 지역 편중을 심화시키는 등 ‘박정희 신화’에 가려진 압축성장의 유물 또한 직시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 대통령이 당시 박 대통령의 추진 방식이 절대적으로 정당했다는 착각으로 현재 국민들을 대하는 것은 아니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