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인클로저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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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자본주의>를 쓴 닉 서르닉은 플랫폼 경제의 진행 과정을 4단계로 설명했다. 데이터 추출의 확장, 게이트키퍼로서의 입지 구축, 시장의 컨버전스, 생태계의 인클로저화가 그것이다. 풀어 설명하면, 데이터 기반의 플랫폼은 그들의 독점적 위상을 확대하기 위해 먼저 데이터 추출의 인프라를 사용자들에게 제공하고, 이를 통해 영역 내 독점을 강화한 뒤, 이종 분야의 시장을 침투해 데이터 사일로(silo)를 건설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완결점이 바로 ‘데이터 생태계의 인클로저화’라고 볼 수 있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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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클로저 혹은 인클로저 운동은 자유롭게 경작할 수 있는 공유지에서 지주들이 소작농들을 쫓아내고 울타리를 치는 행태를 의미한다.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의 발아점으로 두 번의 역사적 인클로저가 언급되는 배경이다. 인클로저의 결과는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사회경제 시스템의 태동과 양극화, 소작농들의 도시빈민화이다.

얼마 전 페이스북은 애플의 사용자 데이터 관리 정책 변경을 강력히 비난하는 성명을 내놨다. 애플이 사용자 데이터 인클로징을 시도했다는 이유에서다. 정밀한 광고 타기팅을 무기로 전 세계 광고시장을 빠른 속도로 집어삼킨 페이스북은 세상 그 어떤 규제보다 애플의 데이터 정책 변경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수만개의 모바일 앱에 깔아둔 페이스북의 데이터 추적 코드가 사실상 무력화되면 페이스북의 핵심 비즈니스는 타격을 받게 된다. 구글이 장악한 오픈웹 생태계의 빈틈을 노리고, 그들만의 데이터 인크로저화를 시도했던 페이스북이 이번에는 애플의 인클로저 운동으로 iOS앱 데이터 생태계에서 내쫓길 위기에 처한 것이다.

우리는 두 거대 기술 기업 간 다툼을 사용자 데이터의 소유권 분쟁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이 둘의 전쟁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 것인가를 유추해야 한다. 애플은 애플대로, 구글은 구글대로, 아마존은 아마존대로 그들만의 데이터 인클로저화를 전방위적으로 추진할 개연성이 크다. 그것이 독점화 방식이고 생존 수단이어서다. 구글 크롬과 애플 사파리 등이 제3자 쿠키 정보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까닭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API를 통한 사용자 데이터의 공유와 전달, 트레킹 코드를 통한 사용자 행동 데이터 추적은 폭넓게 제한되거나 닫혀버릴 수 있다. 서로의 플랫폼을 침투해가며 사용자 데이터를 추출해 광고 수익을 수확해가던 비즈니스는 서서히 구독과 같은 직접 지불 모델로 전환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바뀔까. 데이터 인클로저는 궁극적으로 ‘접근의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플랫폼은 잃어버린 광고 매출만큼 다른 보조적 수익을 강구해야 하는데 사용료나 구독 모델이 최적의 대안이기 때문이다.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서비스를 사용하기 어려워지고 콘텐츠에 접근하기가 불편해진다. 이 과정에서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도래한다. 넷플릭스를 즐길 수 있는 계층과 아닌 계층, 뉴욕타임스의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층과 아닌 계층의 차이는 또 다른 디지털 불평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 구독 경제는 그래서 희망의 메시지만큼이나 불평등의 신호를 동시적으로 품고 있는 양면적 디지털 경제 체제다.

<이성규 전 메디아티 미디어테크 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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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