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비극 왜 한국에서만 일어난 걸까

의약외품이 아닌 공산품으로 분류해 사전에 별도 허가나 승인 없이도 시중에 유통… 정부 책임 미뤄

“우리 아이의 소원이 뭔지 알아요? 체육시간에 마음껏 공놀이를 해보는 거예요.”

“모든 걸 책임진다니, 죽은 우리 아이 살릴 수 있어요? 아이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죽어갔는지 알아요?”

“아이 한 번 잘 키워보겠다고 독약인 줄도 모르고 내 손으로 가습기에 넣었어요. 정말 미안하다면 우리에게 ‘너희가 자식을 죽인 게 아니다’라고 사과해야 합니다.”

지난 2일 옥시레킷벤키저(현 RB코리아)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사건을 공식사과하기 위해 연 기자회견은 시작 5분 만에 중단됐다. “이 순간을 5년간 기다렸다”며 옥시 아타 울라시드 사프달 대표 앞에 선 피해자 가족들은 울부짖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생후 14개월 때부터 산소통을 달고 생활하는 14세 소년도 곁에 있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발생한 지 5년간 침묵으로 일관하던 제조·판매업체들이 잇따라 대국민 사과를 하며 보상을 약속하고 있다. 지난달 18일 가장 먼저 테이프를 끊은 롯데마트를 시작으로 홈플러스도 자체 브랜드(PB)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해 사과했다. 이들 기업은 왜 고개를 숙이는 데 5년이나 걸렸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해명하지 못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검찰 수사 면피용 사과”라고 비판하는 이유다.

이들 기업의 사과는 여러 면에서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가장 많은 피해를 낸 옥시는 당초 기자들에게만 e메일을 보내 사과했다. 첫 문장은 “좀 더 일찍 소통하지 못해 피해자 여러분과 가족분들께 실망과 고통을 안겨드리게 된 점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였다. 검찰에 따르면 옥시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자는 사망자 70명을 포함한 177명에 이르지만, 사실상 가습기 살균제 자체에 대한 사과는 아닌 것이다.

신현우 옥시레킷벤키저 전 대표이사(오른쪽)가 4월 26일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중앙지검에 나오자 피해자 가족과 시민단체 회원이 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재판부도 “국가 과실로 보기 어렵다”
옥시는 “피해자 분들께서 원하시는 부분을 잘 이해하고 경청하여 함께 해결하고자 노력했다”며 “다른 기업들도 이번 사건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 것을 잘 인식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고도 했다. 그간 가습기 살균제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최근 제조·판매 기업들의 사과가 자신들 덕분인 양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옥시는 지난 5년간 100번이 넘게 전화를 해도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다”는 게 피해자 가족들의 하소연이다. 옥시는 책임을 피하기 위해 두 차례나 사명을 변경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임직원들이 해외로 포상여행을 다녀온 사실도 드러났다. 부정적인 여론이 들끓으면서 옥시 전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시작됐다. 그제야 옥시는 지난 2일 기자회견을 자처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홈플러스의 사과 방식도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홈플러스 김상현 대표는 신사옥 이전 기자간담회 자리를 빌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에게 유감의 뜻을 밝혔다. 외부 인사가 참여하는 전담기구 설치 등을 약속했으나 구체적인 보상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검찰 조사에 최대한 협조하고 성실히 임하겠다”는 식의 대답만 했다. 인사치레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 강찬호 대표도 “홈플러스는 롯데마트의 사과 기자회견과 옥시의 e메일 사과를 벤치마킹해 그 중간 수준의 형식을 취한 것”이라며 “진심 어린 사과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부가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실시한 1·2차 피해조사 대상은 사망자 146명을 포함해 530명이다. 3차 피해조사 신청자는 사망자 79명을 합쳐 752명이다. 여기에 민간단체에서 접수받은 246명을 합치면 현재까지 피해사례는 총 1528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239명이 사망했다.

전문가들은 피해자가 더 많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에 따르면 가습기 살균제는 SK케미칼(당시 유공)이 개발한 1994년부터 판매가 중단된 2011년까지 20개 종류가 연간 60만개가량 판매된 것으로 추산된다.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사람들은 894만~1087만명으로, 잠재적 피해자만 29만~227만명으로 추정된다. 현재 신고된 1528명은 잠재적 피해자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해온 기업들은 부랴부랴 사과했지만, 잇따라 사망자가 발생했던 2011년 이후에도 자체적인 피해 조사나 진상 규명을 실시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정부 조사 외에는 집계한 피해규모가 없다”며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만 했다. 2003년부터 9년간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해온 홈플러스는 몇 개를 팔았는지도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고까지 했다.

이쯤 되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번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접하면서 많은 소비자들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1982년 미국 제약회사 존슨앤존슨은 타이레놀 병에 독극물이 투입돼 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문제 해결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섰다. 타이레놀 제조과정을 비롯해 회사의 모든 경영상태를 언론에 공개하고, 2억4000만 달러를 들여 모든 제품을 수거·폐기했다.

1994~2011년 1000만명 가량 사용 추정
존슨앤존슨의 기업 윤리강령인 ‘우리의 신조(Our Credo)’의 가장 첫 문장은 ‘우리의 첫째 책임은 우리 상품과 서비스를 찾는 의사, 간호사, 환자, 환자 가족 등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라 믿는다’이다.

왜 한국에서만 이런 ‘비극’이 일어난 걸까. 환경보건시민센터 임흥규 팀장은 “농약이나 방부제를 물에 타서 가습하는 것을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나 있느냐”고 말했다. 당초 가습기 살균제는 의약외품이 아닌 공산품으로 분류돼 사전에 별도 허가나 승인 없이도 시중에 유통될 수 있었다. 2011년 12월에서야 가습기 살균제는 의약외품으로 분류됐다.

그런데도 정부는 책임을 미루고 있다. 일부 피해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재판부는 당시 유해물질의 정의나 기준 등에 비춰 국가가 주의 의무를 소홀히 한 과실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번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기업과 소비자 간의 문제로만 본 것이다. 그러나 유족들은 “가습기 살균제가 관리 사각지대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국가 책임”이라며 항소했다.

과거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던 소비자들은 언제 피해증상이 발현될지 불안에 떨고 있다. 임흥규 팀장은 “당장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건강상 문제를 증명할 수 없더라도, 비염이나 기침 등의 증상이라도 의심이 간다면 피해신고를 해야 한다”며 “집단소송에 나서는 것도 기금을 조성해 잠재적 피해연구 등을 진행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성희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mong2@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