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2005년 남북정상회담 미국의 BDA제재로 무산”

참여정부 비망록 <칼날 위의 평화> 출간한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2005년 9월에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미국의 BDA(방코델타아시아)에 대한 제재 때문에 무산됐다”고 밝혔다. 최근 노무현 시대 통일·외교·안보 비망록 <칼날 위의 평화>를 출간한 이 전 장관은 6월 11일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2005년 하반기에 북한이 돈세탁을 한다고 의심한 마카오의 BDA에 있는 북한 계좌를 동결하는 등 제재조치를 취했다”며 “북한은 미국과 관계개선을 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을 하려고 했으나 BDA 제재조치로 그렇게 안 됐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자신만만하게 북한의 위조지폐와 돈세탁 문제에 대해 수사했지만 북한의 범죄사실을 증명하지 못하고 결국 동결된 계좌도 풀어줬다”고 말했다.

그는 정상회담 장소와 관련, “북한은 지난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서 남북정상회담을 했기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에 다시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며 “우리가 금강산도 괜찮다고 했기 때문에 정상회담이 열렸으면 금강산에서 개최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석 전 장관은 참여정부 당시 통일·외교·안보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참여정부 5년 동안 노무현 당선인 대통령직 인수위원(통일외교안보분과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 통일부 장관으로 4년간 한반도 통일·외교·안보의 최전선에 있었다.

지금 참여정부 당시 통일·외교·안보와 관련한 비망록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회고록을 썼으면 내가 비망록을 쓸 필요가 없었다. 나는 노 전 대통령의 참모로서 대통령의 철학과 정책 구상을 집행하는 역할을 했다. 내가 노 전 대통령을 대신해 비망록을 펴낸 것은 참여정부의 통일·외교·안보정책이 이념적으로 부당하게 재단당한 면이 있고, 또 일부는 당시에 보안사항이어서 충분히 설명을 못한 측면이 있다. 참여정부 시기에 왜 그런 정책이 나왔는지 설명도 필요하고 해서 책을 내게 됐다.”

이 전 장관은 참여정부에서 NSC 사무차장, 통일부 장관 등 통일·외교·안보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신뢰를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가신 출신이 아니다. 지난 2002년 1월 노 전 대통령께서 대통령 후보로 나올 때 통일·외교·안보분야 자문위원을 맡아달라고 해서 같이하게 됐다. 당시 노무현 후보는 지지율이 겨우 1%밖에 안 됐지만 노무현 후보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굉장히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노 전 대통령이 생각하는 지향점과 기질이 나와 같아서 의기투합된 것 같다. 그 지향점은 자주와 평화에 대한 열망이었다.”

2003년 1월 노무현 당선인 인수위원 자격으로 당시 평양을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장성택과의 만남에서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들었다.
“김대중 정부에서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기 마지막까지 북한과 대화를 통해 실마리를 찾겠다고 방북했다. 노무현 당선인께서 내가 함께 갔으면 해서 갔다. 북한을 방문해서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설명하고 북한이 이에 호응해줬으면 좋겠다고 요청을 했다. 회담이 끝나고 만찬장에서 술이 어느 정도 취했을 때 김용순(당비서 겸 통일선전부장)이 남한식의 폭탄주를 하자고 제안해서 폭탄주를 마셨다. 곁에 있던 장성택(당 중앙위원)은 한술 더 떠 나와 러브샷을 원했다. 장성택과 러브샷을 하는 중에 그 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장성택의 어깨에 토하고 말았다. 당시 북한 사람들은 내 건강상태에 문제가 발생한 것 아닌가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그 이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2003년 12월 영화배우 문성근씨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방북해 김정일 위원장에게 핵문제 해결과 서울 답방을 촉구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는 대목이 있다. 왜 문성근씨가 특사가 됐는지 궁금하다.
“원래는 2003년 4월에 특사를 파견하기로 북한과 합의했다. 하지만 당시에 북핵문제로 한반도에서 긴장이 최고조였던 때였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도 있고 해서 특사 파견을 포기했다. 그리고 9월쯤 돼서 북한에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성근씨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단순한 영화배우가 아니다. 문씨는 노무현 대통령을 만드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고, 노 대통령 또한 문성근씨에 대한 애정이 무척 깊었다.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특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문성근씨는 남북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지식도 갖고 있었다.”

참여정부 초기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 파병 결정으로 지지층을 많이 빼앗겼다. ‘이라크 전쟁을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표현한 노 대통령이 자이툰 부대를 이라크에 파병한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은 진보주의자다. 하지만 대통령은 정치가로서의 역할과 통치자로서의 역할 두 가지가 있다. 이라크 파병은 통치자로서의 결정이었다. 이라크 파병으로 본인의 지지층 절반을 날렸지만 국가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당시 참여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북핵문제 해결이었다. 북핵문제를 풀지 않고는 남북관계도 진전시킬 수 없었다. 만약 참여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하지 않았다면 부시 정부는 한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투명인간처럼 취급했을 것이다. 한국 정부는 한·미관계를 균열시키지 않고, 핵문제를 풀기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기 위해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다. 만약 북핵문제가 없었다면 이라크 파병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2004년 서해북방한계선(NLL) 인근으로 북한 어선이 남하할 때 군당국은 우리 해군의 경고방송에 대한 북한군의 응답사실을 숨긴 채 우리 군이 대응사격한 것만을 청와대에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나.
“2004년 6월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남북은 서해상에서 우발적 충돌 방지를 합의했다. 즉 북한 어선이 NLL지역으로 내려올 경우 남·북한군에 연결돼 있는 직통전화를 통해 우리가 왜 내려오냐고 물으면 북한 측에서 사유를 보내옴으로써 군사적 충돌을 미리 막는 것이다. 당시에 북한 어선이 NLL 가까이 내려왔고 우리 군이 경고사격을 한 사건이 있었다. 군당국의 보고에 따르면 남측의 물음에 대해 북측은 아무런 송신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언론들은 남북이 맺은 합의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고 참여정부를 비판했다. 군당국이 청와대에 제출한 기록에도 북한으로부터 받은 송신기록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 보고를 받았는데 분명히 북한의 송신기록이 남아 있었다. 군이 송신기록을 삭제했고 청와대에도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보고 누락이자 군기위반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이 조사를 지시했다. 하지만 군 일각에서 우리군이 정당하게 대응했는데 왜 청와대는 북한을 비호하느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고, 보수언론들도 청와대에서 군을 압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결국 이 사건은 당시 실무자 몇 명을 경징계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참여정부 때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북핵문제와 관련해 시종일관 대북 강경책을 고수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에 네오콘(보수강경파)이 백악관, 국방부, 부통령실을 장악하고 있었다. 당연히 북한에 대한 불만이 컸을 것이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출발한 6자(남북한 및 미·중·일·러)회담에 대해 미국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6자회담을 주도한 미국은 한·미·중·일·러 등 5개국이 핵을 갖고 장난치는 북한을 압박하고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6자회담을 5대 1 구도로 만들려던 미국의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2005년 6자회담에서 북핵 해결과정을 담은 9·19 공동성명 초안이 나왔을 때 다른 회담국들은 찬성했지만 미국만 반대했다. 결국 미국은 다른 회담국들의 합의를 거부할 수 없어 찬성했다.”

지난 2004∼2005년 한국과 미국 사이에 북한 내부의 급변사태에 대비한 ‘작전계획 5029’를 둘러싼 극비 논의가 있었을 때, 이 협상과정이 언론(신동아)에서 보도됐다. 누가 흘렸나.
“당시에는 몰랐는데 최근에야 진실을 알았다. ‘작전계획 5029’가 월간지 신동아에 보도됐을 때 미국 정부 관계자는 한국 정부에서 언론에 흘린 것으로 의심했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까 우리는 미국 측에 할 말이 없었다. 이 책을 쓰기 전에 신동아 담당기자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까 미국 측 인사가 전달해줬다고 했다. 그 기자에 따르면 ‘작전계획 5029’ 협상을 NSC 사무처에서 주도했는데, 미국이 한국에서 나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참여정부 내내 주한미군 감축과 관련해서 한국과 미국의 입장이 맞지 않아 불협화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도됐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주한미군 감축계획은 미국의 해외주둔 미군 재편(GPR)계획에 따라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철수를 반대해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003년 언론에 주한미군 감축문제가 보도됐지만 한국과 미국은 2004년 여름까지 논의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2004년 5월에 미국이 주한미군 1개 여단을 이라크로 배치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한·미간의 합의가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 사태가 점점 커지자 한국에 있는 미군을 동원한 것이다. 미국 정부가 주한미군을 한국에서 빼면서 이라크 문제 때문이라고 했으면 괜찮았는데, 전 세계 미군 재편의 일환으로 주한미군을 이라크에 배치했다고 발표해 한국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이라크 사태 때문에 주한미군을 차출하고서도 국내 비판을 면하기 위해 전 세계 미군 재편의 일환이라고 발표했다. 한마디로 자기가 살겠다고 친구를 구렁으로 빠트린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참여정부 때 NSC 산하 위기관리센터의 역할과 박근혜 정부 김장수 전 국가안보실장의 “청와대가 재난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고 한 부분이 계속 회자되고 있다.
“위기관리와 관련해 청와대가 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청와대가 직접 위기관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소방방재청 등 실무부서들이 일사불란하게 협조하면서 위기관리를 할 수 있도록 조정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대규모 위기가 발생하면 청와대에서는 긴급현황점검팀을 즉시 만들고 비서실장 주재로 회의를 계속 열면서 상황을 점검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재난이 일어난 이후의 관리 책임은 청와대가 질 수밖에 없다.”

<글·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