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대한민국? 영남민국!

대통령·총리·비서실장·감사원장·검찰총장에 4대 권력기관 고위직 10명 중 4명이 TK·PK … 박 대통령의 ‘국민통합을 위한 대탕평 인사’ 공약 헛말로 드러나

국회가 정부에 요청하는 국정감사 자료 목록 중에 매년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고위공무원의 출신지역, 출신학교 자료다. 하지만 정부의 국감 답변 자료에는 출신학교만 있다. 출신지역 자료는 제출하지 않는다.

‘기춘 대원군’ 중심의 신PK 급부상
여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출신지역 자료는 연고주의 폐단을 해소하기 위하여 90년 4월 공무원 인사기록카드의 본적란을 삭제하여 인사통계 자료로 관리하고 있지 않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예전에는 고위공무원의 출신지역 자료를 받아내려는 야당과 자료를 주지 않으려는 정부가 실랑이를 벌였지만, 최근에는 정부가 아예 ‘본적란 삭제’라는 카드를 꺼내들고 있다는 것이 야당인 민주당의 주장이다.

민주당 의원측은 영남 편중 인사를 겉으로 드러내기 싫어하는 정부에서 고의적으로 자료를 주지 않기 위해 만든 변명거리라고 보고 있다.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진선미 의원(민주당) 측은 “야당에서는 매번 출신지역 자료를 요구하지만 이 자료를 받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4일 국회 운영위에 출석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국회 정무위원회의 민병두 의원(민주당)은 정부에 출신지역 자료를 요구했으나 받지 못하자 지난 7월 직접 전수조사에 나섰다.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등 이른바 4대 권력기관의 고위직 인사 152명의 출신지를 일일이 조사한 것이다. 조사 결과 대구·경북(TK) 출신이 35명(23.0%), 부산·경남(PK) 출신이 27명(17.8%)에 달했다. 영남 출신이 모두 62명으로 40.8%에 이른 것이다.

공석이었던 감사원장과 검찰총장에 황찬현 후보자와 김진태 후보자가 10월 27일 각각 내정되면서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는 다음날 최고위원회의에서 “감사원과 검찰, 국세청 등 4대권력기관 고위직의 41%가 특정지역 출신”이라며 “대통합과 ‘100% 대한민국’이란 약속은 사실상 멸종됐다”고 비판했다.

황 감사원장 후보자는 경남 마산 출신이고, 김 검찰총장 후보자는 경남 사천 출신이다. 경남 거제 출신인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에 이어 4대 권력기관의 두 수장 자리에 PK 출신이 앉게 되는 것이다.

전 원내대표가 언급한 4대 권력기관 고위직의 영남 출신 41%는 바로 민 의원이 직접 전수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민 의원은 검찰 검사장급 이상 검찰 고위직 50명, 경찰청 본청 국장급 이상 및 16개 광역시·도 지방경찰청장 등 경찰 고위직 33명, 국세청 국장급 이상 및 6개 지방 국세청장과 서울·중부·부산 지방국세청의 주요 국장급 이상 등 국세청 고위직 36명, 감사원 감사위원 및 국장급 이상 감사원 고위직 33명 등 모두 152명의 출신지를 전수조사했다.

민 의원 측은 “국정원의 경우 원천적으로 조사가 불가능해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 조사 결과에 대해 민 의원은 “박근혜 정부가 대선 당시 ‘국민통합을 위한 대탕평인사’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 후 지키지 않고 있음이 입증된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등 4대 권력기관의 두 수장이 영남 출신 인사로 채워지고, 이들 조직 내에 후속인사가 이뤄지면 7월 조사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한 편중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7월 조사에서도 수도권은 32명(21.1%), 호남권 27명(17.8%), 충청권 21명(13.8%), 강원·제주·기타 10명(6.6%)에 불과했다. 4대 권력기관에서 영남 출신의 비중이 타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4대 권력기관 중에서도 국세청과 경찰의 고위직 영남 편중이 심각했다. 국세청은 고위직 36명 중 영남권 출신이 18명으로 50%를 차지했다. 경찰에서는 영남권 출신 고위직이 전체 33명 중 15명으로 45.5%에 달했다. 공교롭게도 4대 권력기관 중 영남 편중현상이 그나마 덜 했던 감사원과 검찰의 새 수장에 PK 출신 인물이 앉게 됐다.

끼리끼리 인사에 특정 지역 씨 말라

지난 7월 이후 영남 편중 인사는 더욱 더 노골화되는 경향을 띠게 됐다. 8월 5일 박근혜 대통령이 김기춘 비서실장을 임명했다. 경남 고성 출신인 허태열 실장 대신 경남 거제 출신인 김기춘 실장이 등장한 것이지만 비중은 달랐다. 야당에서 ‘기춘 대원군’이라고 부를 정도로 김 실장은 당·정·청을 압도하는 인물로 부각됐다.

여기에 청와대 사정라인인 민정수석에 경남 마산 출신의 홍경식 수석이 임명됨으로써 권력기관의 축이 신PK로 이동했다. 황찬현 감사원장 후보자와 김진태 검찰총장 후보자의 내정은 신PK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특히 김기춘 실장이 과거 법무부 장관 시절 당시 평검사이던 김진태 후보자와 각별한 관계였음이 알려지고, 황찬현 후보자의 내정 사실을 김기춘 실장이 직접 알렸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야당은 신PK의 ‘끼리끼리 인사’에 대해 공세를 퍼붓고 있다.

정부의 총리 및 장·차관급에서도 PK 출신 인사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정홍원 국무총리를 비롯해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 등이 있다. 신PK의 부각으로 박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TK지역에서는 역차별이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대구·경북의 지역신문에서는 ‘영남권 독식 비판에 대구·경북이 혜택 없이 바가지만 쓰고 있다’며 지역 정가 분위기를 전했다.

정치평론가인 황태순 위즈덤센터 수석연구위원은 “이번에 내정된 황 후보자나 김 후보자가 훌륭한 재목이라는 평판은 받고 있지만 똑같은 재목으로 집을 짓게 되니까 불만이 나오게 마련”이라면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해 경남 서남쪽 해안 출신지역 인사들이 ‘형님’ ‘아우’ 하다보면 정보 흐름이 왜곡되고 경직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황 연구위원은 “박 대통령은 이런 점을 정무적으로 충분히 고려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과거 박정희 정부에서도 그랬지만,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에서 수년째 영남 출신 인사들이 고위직에 중용됨으로써 조직 운영 측면에서나 능력 발휘 측면에서 경험을 쌓지 못하는 타 지역 출신들이 아예 고위직의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영남 출신 인사들이 회전문 인사로 계속 조직 내에 중용되면서 여당 의원의 해명처럼 적격 인사를 찾다보니 결국 영남 출신 인사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황태순 연구위원은 “장·차관직도 중요하지만 정부의 실·국장 인사에서 지역 탕평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홍영표 의원(인천 부평을)은 “박 대통령이 눈에 띄는 인물, 검증된 인물만 쓰고 있다”며 “결국 인재풀이 좁아짐으로써 지역 편중 인사가 되고 온갖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