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인물]‘문재인의 운명’ 이전의 또 다른 운명

경희대 재학 시절 신현태씨 만나면서 학생운동… 가치관과 삶의 방향 바꿔

1974년 10월 18일 경희대 법대 도서관에 한 학생이 나타났다. 그는 “내가 시위를 주동하게 됐으니까 참여하자”며 고시생들을 설득했다. 한 학생이 나서서 “우리는 너와 생각이 다르니까 당장 나가라”며 그를 쫓아냈다.

쫓겨난 학생은 지금의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쫓아낸 학생은 뒷날 검찰에 몸담았다가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낸 ㄱ씨다. 문 이사장 역시 고시장학생으로 입학해 고시반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법학도였다. 유신 시절 경희대의 첫 데모다운 데모였던 이 시위로 문 이사장과 민주당 정범구 의원 등 많은 학생이 구류를 살고 학교에서 처벌을 받았다.

‘문재인의 운명’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면서 치열해 졌지만 이미 그 이전에 예정된 것이었다. /연합뉴스

문 이사장을 몰아낸 고시생들이 할 말을 잃은 건 그 다음이었다. 사법시험 1차 합격자 발표가 났는데, 학내에서 달랑 문 이사장 혼자 합격한 것이다. 질풍노도의 시절 경희대 학생운동권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사법시험 1차 합격의 전설
이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티 나지 않는’ 또는 ‘티 내지 않는’ 실력은 문 이사장의 오랜 성품이다. 가장 정치인답지 않으면서 놀라운 정치력을 발휘하는 것이라든가, 전혀 운동권 같지 않은데 알고 보면 가장 치열하게 운동을 한 점 등이 그의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유신시대 중에서도 가장 엄혹했던 긴급조치 시절의 학생운동은 다른 때보다 몇 배 더 어렵고 잔혹했다. 그 중에서도 변방에 해당되는 경희대에서 학생운동은 이른바 ‘SKY’를 중심으로 한 본진보다 열 배는 더 까다롭고 고달프고 외롭고 처절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는 경희대 6·3세대, 71세대, 긴급조치세대 등을 두루 취재한 경험에서 우러난 기자의 결론이다. 이런 환경에서 문 이사장은 1974년 가을에서 이듬해 봄까지 학내 운동의 불을 지피고 꽃을 피우는 역할을 주도했다.

가정형편이나 개인적 사정으로 볼 때 문 이사장은 운동권이 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된 데는 또 하나의 ‘운명적’ 만남이 숨어 있다. 그와 학생운동을 함께 한 신현태 신당한의원장이다. 학내 조직적 배경 없이 운동의 기반을 구축한 두 사람은 1975년 강삼재 전 신한국당 사무총장과 함께 총학생회를 장악하고 크게 ‘한판’을 벌인 뒤 장렬하게 학교생활을 마감한다. 문 이사장은 이 시위로 구속·제적·강제징집당한 이야기를 저서 <문재인의 운명>에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만남으로써 치열하게 살았던 1982년 이후의 운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문 이사장에게 기자가 쓴 <70년대 캠퍼스>를 보여주며 신 원장과 함께 했던 대학 시절의 일을 묻자 그는 “노 전 대통령 이전에 나의 삶을 바꾼 ‘또 하나의 운명’이 신현태 원장”이라고 말했다.

신 원장은 뒷날 한의사가 됐지만 원래는 화학도였다. 문 이사장과 함께 제적되면서 한의학으로 진로를 바꾼 것이다. 그 역시 문 이사장처럼 티 내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정치적 결벽주의자(?)다. 그는 “결벽증이라기보다 둘 다 감성이 강했고, 그 중에서도 내가 더 감성적이었다”고 회고했다. 따라서 그는 일을 저지르고 문 이사장은 수습하는 게 당시 두 사람 사이의 일상사였다는 것이다. 잘 나서려고 하지 않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피하지 않는, ‘문재인의 운명’은 노 전 대통령과의 만남 이전에 이미 예정됐던 것인가.

<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