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호가 만난 사람]‘이민 선생’의 활약상을 아시나요

이재오에게 이런 일이, 대성고 교사 시절 소설 쓰고 연극 연출

재야 투사, 야당 돌격대, 여권 실세의 길을 밟아온 이재오 특임장관의 이력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소설을 쓰고 연극을 연출하고 교사로서 제자와 교단, 문화예술계에 강한 인상을 남긴 전력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74년 9월 서울 대성고등학교에 새 국어교사가 부임했다. 검정 두루마기 차림으로 교실에 들어선 그는 겉모습부터 범상치 않았다. 수려한 용모와 당당한 체구, 야성적인 장발, 강인한 구레나룻은 학생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당시 학생이었던 작가 이헌씨의 표현을 빌리면 장비를 닮은 듯하면서 관우를 떠올리게 했고, 둘을 합쳐놓은 모습 같기도 했다.

그는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남학생들의 눈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첫 수업 날이었다. 칠판에 커다랗게 이민(李民)이라고 이름을 한자로 쓰고, 밑에다 민중(民衆)·역사(歷史)·진리(眞理)라고 휘갈겼다. 불온한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웠던 유신 시절 그는 ‘민중’을 말하고, ‘프랑스 혁명’을 논하고, 교과서에 기술된 동학란을 ‘동학혁명’이라고 불렀다. 학생들은 스승의 용기와 신념에 감복했고, 그는 제자들 사이에 영웅으로 떠올랐다. 당시 제자였던 노웅래 전 의원은 “정치와 사회의 눈을 뜨게 해준 삶의 스승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서울시내 교사들과 극단 조직도
이민 선생의 활약은 교실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교지에 당시 정치상황을 빗댄 <깃발>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는가 하면 학생 극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그가 지도한 첫 작품 <불꽃>이 전국학생연극경연대회를 휩쓰는 등 놀라운 성과까지 거뒀다. 서울시내 중·고등학교 교사 40명으로 ‘상황’이라는 극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그가 연출한 상황극·시대극은 번역극이나 연애극 중심의 기성 극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뒷날 연극연출가, 영화배우로 이름을 떨친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당시 배화여고 독어교사로서 이 극단에 참여했다. 창단 공연작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주제가는 그 뒤 대학가와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서 저항가요로 애창됐다.

교사이자 연극연출가로 잘 나가던 이민이라는 이름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은 1977년 3월 어느 날이었다. 이민은 이재오의 가명이었다. 그는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 방한과 한국 인권상황을 풍자한 연극 <삼중인격>이 문제가 돼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갑자기 존경하는 스승을 잃은 제자들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의 구속에 대한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긴급조치 9호 시절, 그 진상은 호도되어 학생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겨졌다. 이 장관이 가명을 쓴 것은 장훈고등학교 교사 시절 서울대 10·2데모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된 전력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교원이 부족했던 당시에는 사립학교 임시교사에 대해서는 채용보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점을 이용해 그는 학교 측에 양해를 구하고 가명을 사용했던 것이다.

신동호가 만난 사람

이 장관은 군복무 중 몸담은 이동중학교를 포함해 4개 중·고등학교에서 교사 노릇을 했다. 가명을 사용한 덕분에 그는 교사 생활 중 대성고에서 가장 오래 근무할 수 있었다. 고작 3년여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가 치른 5번의 옥고 중 4번이 교사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교실에서 수업 중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연행되기도 했다. 이 장관은 자전적 에세이집 <함박웃음>(생각의 나무)에서 교사를 천직으로 삼아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꿈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