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 있습니다](15)다시 하르츠 개혁을 주목하겠다면

하르츠 개혁은 1990년대 독일 통일과 유럽통합의 시대를 맞이해 기존에 서독에서 가꿔온 노동시장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2000년대에 추진한 개혁방안이었다. 서독은 동독을 흡수통합하는 과정에서 최대한 지역 차별을 하지 않으려 했고, 생산성이 낮은 동독을 대폭 지원해야 했다. 동독의 마르크화를 서독과 마찬가지로 1 대 1로 하면서 동독의 물가는 치솟았고, 동독의 국영기업들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인력이 늘어나 실업도 급증하게 됐다.

페터 하르츠 박사가 2018년 6월 19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2018 경향포럼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1990년대 탈냉전의 시대를 맞이해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여러 국가는 외국자본의 유치를 위해 규제 완화 경쟁에 돌입했다. 독일의 자본은 보다 저렴한 조건을 찾아 다른 나라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려 했다. 그 결과 독일 국내의 고용위축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이러한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독일은 신규 일자리 창출력이 약화됐고, 두 자릿수 고실업률이 지속됐으며, 사회보장 시스템은 장기 고실업을 타개하지 못한 채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지탱해야 했다.

이러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1998년에 집권한 적녹연정 정부는 노사정 사회적 대타협을 추구했다. 이른바 ‘고용을 위한 연대’의 시도가 바로 그것이다. 애초에 금속노조의 리더들이 보수정부 시기(헬무트 콜 수상 재임 말기)에 주창한 것을 1998년 정권교체 이후 보다 정교화시켜 추진했다. 하지만 당시 타협에 인색했던 독일 노동계, 특히 새로 출범한 통합서비스 노조 베르디(Ver.di)가 이를 수용하지 못했던 등의 이유로 대타협은 실패하고 만다.

1990년대 말 이러한 사회합의적 개혁 노력은 실패했으나, 그 전인 1990년대 초 독일 사회 일각에서는 노사타협을 통한 위기극복의 성과를 국지적으로 경험한 바가 있었다. 글로벌 자동차회사 폴크스바겐(VW)의 사례가 그것이다. VW은 1993년 무렵 대규모 고용감원의 필요에 직면했는데, 당시 노사의 타협과 지방정부(니더작센주) 지원을 통해 타개책 마련에 성공했다. 약 3만명의 감원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1주당 노동시간을 28.8시간대로 줄이는 것을 포함한 참신한 개혁이 이뤄져 한사람의 감원도 없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VW사가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데는 이 회사 노무담당 이사였던 페터 하르츠(Peter Hartz) 박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니더작센주 주지사였던 슈뢰더의 지지도 한몫했다.

노동시장 현대화를 위한 보고서 앞서 언급한 ‘고용을 위한 연대’의 실현에 실패한 이후, 적녹연정 정부는 2002년 구사일생으로 2차 집권에 성공한다. 이후 슈뢰더는 노사정 대타협의 길을 버리는 대신 VW 하르츠 이사를 정치권으로 소환해 노동시장 개혁안을 마련토록 임무를 부여한다. 이른바 하르츠위원회(Hartzkommission) 구성이 그것이었다. 이 위원회는 위원장인 하르츠를 포함해 각계각층의 전문가 15인으로 구성했다. 노동계, 학계, 재계, 시민사회 등 다양한 영역의 인사들이-조직 대표가 아니라-개인 자격으로 위원회에 참여해 필요한 개혁방안을 함께 만들어갔다. 그 결과 6개월 만에 위원회는 하르츠 보고서(Hartzbericht)를 내고 슈뢰더 총리에게 보고했다.

하르츠 보고서의 정식 명칭은 ‘노동시장 현대화를 위한 보고서’였다. 그 안에는 13개의 참신한 개혁방안이 담겼다(보고서에서는 각 방안 하나하나를 ‘개혁모듈’로 칭했다). 우선 연방고용청의 조직과 역할을 개혁해 연방고용공단으로 개칭했다. 이를 통해 노동시장 서비스를 현대화하고, 실업보호와 실업자지원제도를 개선해 슬림화·효율화시키려 했다. 실업자에게 창업을 장려하고, 구직행위를 의무적으로 강제했다. ‘미니잡’이라고 하는 부업형 일자리를 활성화하고, 연방고용공단 내에 파견 일자리 중개업체(PSA)를 둬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다. 모두 당시로는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것들이었다.

하르츠 보고서를 받은 이후 슈뢰더 총리는 그 내용을 담아 정치적 승부수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노동사회개혁 패키지를 구상해 공표했다. 이른바 ‘어젠다2010’이라고 하는 개혁프로그램이었다. 여기에는 고용시스템 개혁뿐 아니라 건강보험, 연금보험 등 사회보장 체계에 대한 개혁안까지 포함됐다. 어젠다2010에 따라 하르츠 보고서에 담겨 있던 방안을 중심으로 한 4개의 연계 법안이 만들어졌다. 하르츠 법안(Hartzgesetz)으로 불린 해당 법률 조치는 독일 노동복지체제의 제도적 근간이라 할 사회법전을 바꾸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2003년부터 2004년 사이에 각 법안은 입안과 실행에 돌입했다. 그 결과 독일의 사회국가(Sozialstaat) 시스템은 그것이 형성된 19세기 말 비스마르크 시기의 원리로부터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개혁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하르츠 법안 4개 가운데 마지막 4장(Hartz IV)의 실행은 강한 정치적 반발을 낳았다. 해당 내용은 장기 실업자들이 수령해오던 실업수당을 삭감하고, 자산조사를 해서 그에 부합하게 생계비를 지원해주는 식이었다. 실업자 개념을 없애고 모두 구직자로 정의해 끊임없이 구직행위를 증명하게 했다. 이러한 조치에 실업자들은 구동독 시절 공산당 정권에 저항해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도모했던 월요시위를 패러디해 하르츠 개혁을 반대하는 월요시위를 한동안 매주 개최하기도 했다. 몇몇 조항에 대해서는 헌법소원도 제기했다. 게다가 개혁의 효과가 당장 수치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슈뢰더는 결국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2년간의 개혁조치를 완수했으나 그는 끝내 더 버티지 못하고 2005년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내각을 해산하고 총선에 돌입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그 결과 사회민주당은 기민당이 주도하는 대연정의 파트너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이를 통해 앙겔라 메르켈의 시대가 열렸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17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날 노동개혁 구상을 밝히면서 ‘하르츠 개혁’을 언급했다. / 강윤중 기자

단기간 효과 없자 개혁 반대 봉착 이후의 경과는 하르츠 개혁의 성과가 없지 않음을 증명한다. 2000년대 중·후반을 겪으면서 독일은 고용률의 신장과 실업률의 획기적인 감소를 경험했다. 적어도 미니잡만 해도 2년 사이 약 200만개가 늘어났다. 인력 도급이라 할 수 있는 파견노동도 꾸준히 증가했으며, 정규직 중에서도 파트타임 일자리들이 상당수 증가했다. 말하자면 임금과 근로시간의 덩어리를 줄이고 쪼개서 일자리 수를 늘린 것이다. 그 결과 2010년대 들어 독일은 유럽에서 이른바 저임금 일자리가 가장 많은 나라로 바뀌었다. 연방고용공단의 일자리 중개, 취업유도 실적도 자연스럽게 호전됐다.

하르츠 개혁은 한마디로 신자유주의 글로벌화에 발맞춰 독일이 노동사회 시스템의 일부를 뒤늦게 바꾼 것이라 칭할 수 있다. 개혁의 주창자들이 이야기하듯 그것은 독일의 사회국가를 폐지(압바우·Abbau)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재구성(움바우·Umbau)하려는 시도였다. 핵심은 국민이 실업을 피하고 일자리를 보다 쉽게 얻도록 일자리의 수요, 공급, 중개 등 3가지 측면에서 변화의 기제를 획기적으로 도입한 것이었다. 다만 그것이 기존에 사회보험이 적용되는 풀타임 정규고용 중심 독일 노동시장의 체질을 현격하게 뒤바꾼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대체재라기보다 보완재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개혁이 그렇듯이 이 개혁은 일정하게 명과 암을 동시에 지닌다. 그러하기에 그에 대한 평가도 갈린다. 워낙 개혁의 범위가 넓었기 때문에 평가자마다 천착하는 지점이 다르기도 하다.

한국에서 다시 하르츠 개혁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화, 고령화, 세대갈등을 극심히 겪고 있는 한국사회가 20년 전 독일의 하르츠 개혁에 눈길을 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필자는 일단 2가지 측면에서 하르츠 개혁에 긍정성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하나는 개혁의 방식이다. 하르츠 개혁은 ‘하다 만’, 한번 건드려 보고 접은 ‘아니면 말고 식’의 것이 아니었다. 그 범위를 상당히 넓게 설정하면서도 끝까지 밀고 나갔다. 개혁의 방향 자체에 대해서 논란이 이는 것은 차치하고, 개혁 자체가 물타기에 무너져 ‘하다 마는’ 경우가 허다한 것에 반해 이 개혁은 적어도 그렇지 않았다.

또 다른 하나는 개혁의 내용적 측면에서 일자리 중개 체제를 획기적으로 변모시키고 강화했다는 점이다. 이미 연방고용청이라고 하는 우리가 가져보지 못한 독일식 노동시장 거버넌스의 획기적인 시스템을 두고 있었던 것에서부터 시작하긴 하지만, 덩치 큰 공룡같이 된 제도와 기구를 근본적으로 전환한 점은 주목할 만한 노력이었고 나름의 성과였다. 일부 기능은 지자체가 가져가거나 양자의 협업에 의해 작동하도록 하는 등 최대한 현실 적합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구직자들에 대한 밀착 서비스와 관리를 하면서 행정의 효율을 높였다.

노동개혁은 끈기 있게 추진해야 한국에서는 흔히들 하르츠 개혁이라고 하면 미니잡과 고용률 신장을 떠올린다. 박근혜 정부 시절의 프레임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미니잡은 당시 박근혜 정부가 강조한 ‘반듯한 시간선택제 일자리’와는 거리가 먼, 일종의 부업형 일자리들이다. 이는 독일에서 과거부터 이미 활성화돼 있던 관행(이른바 경미고용)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그러했기에 초기에 그 수가 급증했다가 더 이상 증가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차라리 독일에서 당시 정규직 시간제 일자리들이 많이 늘어난 것은 오히려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에 더 부합하는 모습인데, 한국에서 그에 대한 논의와 모색은 그다지 진행되지 않았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중구조화의 문제, 즉 노동시장 내 불평등의 고착화와 저질의 일자리 양산 문제를 풀어내려면, 하르츠 개혁을 우리의 맥락에 맞게 ‘의역’하는 것이 필요하다. 실업자(구직자)에 대한 보호와 서비스, 직업훈련의 실질성, 일자리 중개와 관련한 인프라 등에 있어서 우리와 독일은 출발점부터 다르다. 하르츠 개혁의 취지를 헤아리면서 우리도 고용서비스의 현대화에 노력할 필요가 있겠으나, 그 이전에 일단 중개될 일자리의 질부터 챙겨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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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노동조합을 개혁의 적으로 몰거나, 결과적으로 정규직 일자리의 질을 저하시킬 수 있는 근로시간과 임금의 유연화에만 몰두해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총체적 개혁과 이중화된 노동시장의 극복에 도달하기 힘들 것이다. 산업구조의 미래지향적 재구성과 사회통합의 새로운 비전을 동시에 지니면서, 현재의 양극화된 일자리 상태를 지양하는 대안적인 일자리 모델을 노사정의 대화와 타협을 통해 고안하고 확산해갈 필요가 있다. 창의적인 대안을 마련하려면 노동개혁, 교육개혁 그리고 연금개혁까지 모두 유기적으로 결합돼야 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노동사회 시스템의 개혁을 끝까지 결기 있게 추진해간다면,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변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