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마당]'일왕'인가, '천황'인가

노무현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 내용을 떠올리며 새삼스런 질문을 던져본다. "일본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무엇보다 일왕(日王)에 대한 호칭 때문이다. 때로는 '일황(日皇)'으로, 또는 '천황(天皇)'으로 불리기도 하는 호칭. 그들의 발음대로 '덴노'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전혀 없지는 않다. 각각의 이름이 한-일 과거사 문제는 물론 미래의 동반자관계에 대한 우리의 기본 인식을 담게 된다는 점에서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문제임에 틀림없다.

노 대통령은 이번 연두기자회견에서 "'일본 왕'이라고 써야 하는지, '일본 천황'이라고 써야 하는지 미처 준비를 못했다"며 양해를 구하고는 '일본 천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임기중에 천황의 방한문제를 추진할 생각이 있느냐"는 어느 일본 기자의 질문에 답하면서다. 언론들은 이에 대해 노대통령이 용어 선택에 신중한 태도를 취한 것으로 평가했으나, 정말 그렇게 너그럽게만 넘겨야 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올해로 광복 60년에, 한일수교 40년을 맞는다는 단순한 연대기 차원에서도 공연한 트집만은 아닐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 '욘사마 열풍'을 비롯한 한류가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도 양국의 관계설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일왕에 대한 인식과 표현은 가장 기본적인 사항에 속한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모두 '천황'이란 이름 아래 이뤄지지 않았는가. 쓰라렸던 과거사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기 위해서도 그 칭호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의 국민감정을 내세워 일왕에 대한 칭호를 격하시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외교 관례를 앞세워 그들이 부르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도 결코 아니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정부의 시각과 기준이 어떤 것인지 묻고 싶을 뿐이다. 과연 그런 일관된 입장이 있기는 있는 것인가.

물론 복잡한 문제다. 역대 정부를 거치면서 적잖은 논란이 이어졌으나 여전히 원점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노대통령의 완곡한 언급도 괜한 불씨를 키우지 않으려는 뜻에서 미리 계산됐다고 여겨지는 까닭이다. 노대통령의 말대로 "미처 준비를 못해서"가 아니라,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기 위해 슬며시 얼버무리고 넘어가지 않았나 생각된다는 얘기다. 정부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상대방 국가 지도자의 칭호에 대해 검토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자체로도 문제가 없지 않다.

우리 정부는 재일동포 지문날인 강요로 반일감정이 악화된 1989년 이후 '일황'이란 용어를 사용해왔지만, 어디까지나 국내에서의 호칭이었지 일본에 대해서는 '천황(영문으로 His Majesty Emperor of Japan)' 호칭을 써 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천황 폐하'라고 언급한 적이 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 당시에는 외교관례를 들어 정식으로 '천황'으로 부르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국내 언론들이 '일왕'으로 낮추어 표기해온 것은 별개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새해를 맞아 대일(對日) 과거사 문제와 미래 협력관계 정립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전향적인 관계가 추진돼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지난날 일제치하에서 강제 징병-징용과 위안부 노릇에 울음을 삼켜야 했던 쓰라린 국민감정을 한꺼번에 정리할 수 없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최근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회담을 성사시켰던 당시 정부에 대한 들끓는 비난 여론도 결국은 일본을 향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는 문제다. 그렇다고 피해갈 수는 없다. 피해가서도 안 될 일이다. 이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명쾌한 답변을 듣고 싶다.

허영섭(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