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경이 만난 사람]강지원 변호사

여러 우물을 파보자

KBS 라디오 시사프로와 교육방송 토크쇼 진행, 여성정치기금 운동 공동대표, 마당극과 영화 출연, 음악회에서 독창, 한복 패션쇼에 모델로 등장, 자신의 책도 펴내고 초등학교 은사의 기념시조집 발간, 방송국 가요대상 심사위원장....

2004년 한 해 강지원 변호사(55)는 본업 외에 이렇게 다양한 일, 특히 문화활동을 하며 보냈다. 워낙 다채로운 활동으로 연예인 이상의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그이지만 "왜 그렇게 딴짓을 많이 하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부지런하다거나 호기심이 많아서 할 수 있는 일만은 아니어서다.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제 '화두'가 인간에겐 과연 적성이 몇가지일까라는 겁니다. 제 생각에 사람들은 모두 5, 6가지의 재능은 갖고 태어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한 우물만 파라고 했지만 다양성의 시대인 지금은 달라져야죠. 청소년들에게 강의할 때도 조물주로부터 받은 달란트, 즉 자신의 재능을 모두 개발해 보라고 권해요. 이것 저것 직접 체험하고 느끼다보면 자기 인생이라는 독특한 작품이 나오는 것 같아요"

"2월에 메조소프라노 김영옥씨가 '성악을 하면 잘할 것 같다'며 레슨을 받아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제안이 당혹스럽거나 싫지 않았어요. 막연히 어렸을 때 노래를 하고 싶었는데 입시, 출세지향적 교육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1주일에 한번씩 테너 김성암씨에게 개인 레슨을 받았습니다."

6개월간 레슨받고 또 임웅균 교수에게 쪽집게 과외받듯 강도높은 훈련을 받아 무대에 섰다. 추석 때는 KBS 특집프로에 턱시도까지 입고 출연해 노래실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오지랖이 넓다' '너무 튄다' 등의 비난을 하는 이들도 있고 부인인 김영란 대법관은 "이제 춤만 잘 추면 되겠다"고 우스갯소리도 했다. 그는 자발적이진 않아도 문화와 관련된 제안을 받으면 '싫지 않아서' 응했고 그럴 때마다 즐거워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니 자신 속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기쁨이 컸다.

"시사프로를 진행하면서 우리나라가 너무 당파적이고 공격적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극단적으로 파가 나뉘다보면 싸움박질 등 공격과 폭력성만 강조됩니다. 자학적인 일들이죠. 그런데 문화활동을 하다보니 이런 일들은 비폭력적이고 자기애가 생기더군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무조건 공부만 하라고 들볶을 것이 아니라 다른 재능, 특히 문화적 재능을 찾아 키워주는 것이 필요해요.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문화활동을 하다보면 인성도 좋아지고 폭력도 줄어들 거란 확신이 듭니다."

나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말라

9년쯤 전, 당시 검사로 활동하던 강지원 변호사와 방송 토론 프로그램에서 만난 적이 있다. 경기고에 서울대 법대 출신. 행정고시와 사법고시 수석 합격 등 초엘리트 교육만 받아온 무서운 검사님이라 깐깐하고 고지식하리란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그날 주제는 학교에서 폭력서클 가입을 강요받아 고민하는 남고생 문제였는데 '검사님'께서는 "그렇게 시달리고 고통받느니 차라리 학교를 그만둬라. 억지로 다닐 이유가 없다. 자퇴해도 검정고시로 얼마든지 대학 들어갈 수 있으니 폭력조직에 가담하지 말라"고 말했다. 막연히 "어떻게 해서든지 참고 견뎌 정규 과정을 마쳐라"란 공자님 말씀을 기대하던 터라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공안 담당 등 촉망받던 검사이던 그는 1989년 서울보호관찰소장을 맡아 소년범 치유프로그램을 전담하며 '청소년 지킴이'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타고난 탐구심과 연구의욕으로 청소년 전문가가 되었다. 청소년 문제를 연구하다보니 비행청소년에게 관심이 가서 심리학과 카운슬링을 공부했다. 그는 국내 최초로 청소년범죄자들에게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도입했고 비행청소년 문제를 파헤치면서 가족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97년에는 청소년보호위원장에 취임하면서 사회환경에 눈떠 술, 담배, 유해약물은 물론 음란성매체 등 유해환경 퇴치운동을 펼쳤다. 청소년의 절반인 여성 청소년 문제를 연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성매매 문제에도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신상공개법을 만들어 성매수자 명단을 인터넷에 공개도 했고 성매매금지법을 만들자고 수년 전부터 주장했다.

"청소년 문제를 공부하면서 인생관이 바뀌었어요. 출세하고 돈 많이 버는 게 훌륭한 삶이고 행복한 것인가란 질문을 하게 되더군요. 그게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잘 하는 일을 마음껏 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삶이란 것을 깨달았고 이왕이면 이웃과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자 결심했죠."

"제 성장과정의 반작용 때문에 청소년 전문가가 된 것 같아요. 전형적인 엘리트교육을 받아 개성을 말살당한 나와 같은 시행착오는 겪지 말아야 한다고 항상 강조합니다. 엘리트만 최고로 대접받는 사회는 차별을 양산하고 열등감과 공격성을 유발해 계층간 폭력을 만들어내죠. 엘리트가 되지 못한 원망, 분노 등등을 사회에 폭력으로 돌려주니까요."

매우 지당한 말씀이지만 이런 말을 들으면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꼭 경기에 서울대 나온 사람들이 '학벌 필요없다'고 강조하고 고시에 합격한 이들이 "고시 별거 아니다"라고 하지만 그건 스테이크와 랍스터를 먹어본 이들이 "별로 맛 없어. 그냥 김치찌개랑 밥이 최고야"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못 먹어본 이들의 허기와 욕망을 알까.

강변호사는 "시대가 달라졌다"고 강조한다. 엘리트들이 더 이상 행복한 시대가 아니란 것이다. 이젠 다양성의 시대, 개성의 시대이므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학벌이건 돈이건 차별을 양산하는 구조를 서로 노력해서 타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초당파 운동을 펼친다

요즘 강지원 변호사의 행보를 보면 시민운동가를 넘어서 구도자의 길을 걷는 것 같다. 자신의 방송출연료나 책 인세를 모아 수천만원을 청소년단체에 기부했는가 하면 각종 봉사활동과 시민운동에 앞장선다. 지난달 한국리더십센터가 조사한 '가장 신뢰-존경받는 리더'에 관한 설문에서는 시민운동 부분에 1위를 차지했다. 올해 3월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전혀 주변에 알리지도 않고 상중에도 라디오 생방송을 진행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 모친은 물론 부친 역시 노인성치매를 앓았는데 강변호사 부부가 수년간 대소변을 받아냈다. 부인이 대법관에 임명되었을 때는 자신이 진행하는 시사프로가 공직자인 부인에게 누가 될지 모른다며 방송활동도 중지했고 변호사 업무도 청소년-여성 등의 공익과 관련된 일만 주로 맡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고보니 옷 스타일도 달라졌다. 넥타이 매는 것이 싫어서 골랐다지만 가톨릭 신부의 로만칼라를 연상케 하는 셔츠를 즐겨 입어 성직자 같아 보이기도 한다.

솔직히 모든 이로부터 '바른생활 인간'으로 분류되는 이의 진짜 삶은 얼마나 고될까. 술집도 가기 힘들고, 누구에게 화를 내거나 상스러운 말도 못하고, 방귀나 트림마저도 신경써야 하는 삶을 산다면 참 피곤할 것 같다. 이렇게 맑고 공익적인 이미지로 사는 삶은 어떨까.

"억지로 시킨 일이나 꾸민 이미지라면 그렇겠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어서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어차피 돈에도 큰 욕심이 없고 청소년 문제는 사명감을 갖고 신나서 하는 일이니까요. 또 누구 눈치를 보거나 구속받지 않는데 뭐가 힘들겠어요. 어떤 이들은 정치적 야심이 있어 그런다고 오해도 하는데 전 절대 정치 안합니다."

표정과 얼굴 빛을 보니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 것 같다. 하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칭찬도 받으니 행복겠지.

강변호사는 이제 청소년지킴이에 이어 여성지킴이로도 나섰다. 모 스포츠지에는 '최진실은 내가 지킨다'는 선정적인 제목으로 소개되었지만 이혼했다는 이유로 광고주인 건설업체로부터 30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받은 탤런트 최진실의 무료 변론을 맡아 화제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빈곤여성도 아니고 수십억원의 재산가인 최씨를 왜 무료 변론해주느냐"고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만약 유료변론을 하면 얼마를 받았냐 등등으로 얼마나 시달리겠어요. 이 사건은 최씨 개인사건이라기보다 여성인권에 관련된 공익문제여서 나선 겁니다. 여성, 이혼녀, 인기연예인 등 복합적인 사회적 편견과 가정폭력에 시달린 최진실씨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의 인권문제를 제기할 겁니다. 우선 건설회사의 청구액이 너무 과하고 전속모델이 이혼했으면 도움을 줘야지 손해배상소송을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하겠다는 후배 변호사 20여명이 지난 13일에도 모여서 대책회의를 했어요. 돕겠다는 이가 많으니 좋은 결과가 나오겠지요."

생각과 탐구심이 많다는 강지원 변호사. 새해에도 그는 우리나라의 고질병인 당파성을 깨는 '초당파 운동'을 펼 예정이다. 지역-이념-세대간 당파로 나눠 서로 싸우고 스스로를 구속하는 당파성을 타파하기 위해 온힘을 다할 거란다. 이러다가 슈퍼맨 차림으로 하늘을 날아가는 것은 아닐까...

유인경이 만난 사람

글|유인경 편집장 alice@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