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안풍자금은 92대선 잔금?

1992년 14대 대선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선 후보캠프의 선거자금은 남아돌았다. YS는 대선운동 기간 중 연일 계속되는 지방유세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서울에 올라왔다. 당시 민자당 인사들은 "서울에 올라올 불가피한 이유가 있지 않냐"고 공공연히 말했다. '선거자금 모금 때문임을 짐작하고도 남지 않느냐'는 반문이다.

당시 한 언론사는 민자당 공식루트로 인해 모금한 대선자금은 3천1백76억원이라고 보도했다. 이중 YS가 직접 마련한 돈은 96%인 3천80억원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당 공식라인을 통한 모금이다. 사조직까지 합하면 그 규모는 5천억원을 넘을 것이라는 게 당시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실제 선거에 관여했던 당시 민자당 소속 민주계 인사들은 "1992년 대선은 돈이 부족하지 않았다"면서 "이전 대선은 대규모 인력동원이 있었지만 14대 대선에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 경남지역의 한 의원도 "'부산-경남은 예외였지만 수도권 등 격전지의 상당수 지구당위원장들은 적지 않은 선거비용을 남겼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풍족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하위 당직자는 대선 후 중형승용차를 구입, 구설수에 시달리기도 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대선이 끝난 뒤 현역 의원과 지구당위원장, 선거대책본부책임자들에겐 특별격려금까지 지급됐다. 그 규모는 각각 1천만원 이내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YS도 14대 대선에 쓴 선거비용 규모에 스스로 놀랐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이런 고비용 대선과 정치구조가 계속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술회한 적도 있다. 그가 "재임 중 절대로 돈을 받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도 그런 충격 때문이었다는 후문이다.

드디어 김영삼 전 대통령에 불똥

그 대선자금의 규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엄청난 대선자금이 남아 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어떻든 안기부에 위탁하기 전, 즉 1993년 7월까지 'YS자금'이 어떤 형태로 관리되었을지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우선 청와대 총무비서실 재무팀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여되지 않았겠느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청와대 금고지기'는 곧 청와대 주인과의 돈독한 신뢰가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청와대 총무팀으로 호흡을 맞춘 당시 홍인길 총무수석-강상일 재무비서관-배덕광 행정관 등이 그 내막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대선과정에서 홍 전 수석은 총무보 좌역을 맡았고 현재 부산 해운대구 구청장인 배덕광씨는 국세청에서 청와대에 파견나온 인사다. 이들 실무자는 사실상 비자금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라는 관측을 낳고 있다. 이들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이들은 대선 직전에서도 민자당사 주변에서 자주 마주쳤다"면서 "요즘도 홍 전 수석과 강 전 재무비서관은 지방 출신 기업인들과 자주 전남 ㅁ리조트에서 골프모임을 갖는 등 유대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배 청장은 청와대를 나온 직후 춘천세무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편 대선 당시 C금융기관에서 근무했던 ㅇ씨도 청와대 재무관계자와 잦은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그의 역할에 세인의 관심이 모아지기도 했다.

YS가 퇴임할 즈음 C기관에서 퇴직한 ㅇ씨는 7월 8일 "나는 YS 대선자금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안풍 재판에서 강삼재 전 의원의 변호를 맡은 정인봉 변호사는 "만약 YS가 대선 잔금을 남겼다면 가-차명으로 관리되던 자금을 1993년 7월에 도입된 금융실명제 실행 직전에 안기부에 넘겨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안기부 금고 열쇠를 쥐고 있는 심복인 김 전 차장의 역할이 YS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것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과거에도 검찰이 비자금을 추적하다가 안기부 계좌가 발견되면 덮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안기부 계좌야말로 '은밀한 자금'의 피난처로 제격이라고 여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고법의 판결에서도 안기부에 위탁관리된 자금은 곧 'YS 비자금'임을 암묵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곧 안풍자금의 성격은 '권력형 자금'이라는 얘기다. 재판부는 "1천2백억원은 외부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크고 이 사건 자금 9백40억원을 김 전 대통령에게 직접 받았다는 강 전 의원의 진술과도 자연스럽게 일치한다"고 밝혔다. "안풍자금은 안기부 자금이 아니다"라는 판결인 셈이다. 재판부는 또 "대통령 지시 없이 안기부 운영차장이 자신의 판단으로 여당 사무총장에게 1천1백97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는 점은 믿기 어렵고, 안기부에서 인출한 수표가 짧게는 두세 달, 길게는 11개월 만에 신한국당 관리 계좌에 입금됐다는 점에서 제3자가 개입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물론 이 대선잔금은 순수하게 YS가 대선을 앞두고 모금한 자금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대선자금도 일부 포함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노태우 정권 당시 황태자로 통했던 박철언 전 체육부 장관의 한 측근은 최근 "박 전 장관이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도 10배인 2백억원을 줬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단지 2백억원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당시 김대중 총재(DJ)가 이끌던 국민회의는 YS가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3천억원을 받았다고 줄곧 주장해왔다. DJ는 당시 김중권 청와대 정무수석으로부터 노 전 대통령의 선거지원금 20억원을 받은 사실을 고백했다.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은 조금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다. 최 의원은 김 전 차장이 관리한 자금은 노태우 정권 때 안기부에서 관리되던 통치자금이라고 주장한다. 이 자금을 인수인계받은 YS가 95년 지방선거와 96년 총선지원금으로 쓴 것이라는 얘기다. 안기부 예산운용 구조상 외부에서 1천억원 이상의 뭉칫돈이 들어가고 나올 수 없다는 게 이런 주장의 근거다. 그는 이에 앞서 7월 7일 국회 법사위에서 강금실 장관에게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 이후 신고한 재산을 보면 약 17억원"이라면서 "자기 돈이 아니라면 1천2백억원이라는 돈이 어디서 나와서 한나라당에 지원된 것인지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강상일-배덕광 등이 실무자 라인?

어떻든 대선잔금의 불똥은 YS에게 튀고 있다. 안기부 위탁관리 자금의 실체에 대한 여야의 공격이 만만치 않다.

"안풍사건은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정치자금 사건의 이면이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7월 5일 안기부 예산에서 1996년 총선과 1995년 지방선거 자금을 지원한 게 아니라 YS의 자금을 안기부가 관리한 것이라는 서울고법의 판결에 대해 사필귀정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안기부 예산을 선거자금으로 불법 전용했다는 '안풍사건'이 부메랑이 되어 YS의 대선자금 사건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홍준표 의원은 "당 외부 인사인 5~6명의 핵심 관련자는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핵심 관련자란 홍인길 전 총무수석, 박관용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YS 측근을 말한다. 홍 전 수석, 박 전 실장은 물론 그동안 대변인 역할을 맡았던 박종웅 전 의원, 현재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김기수씨 등 자금조성 경위와 성격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 침묵은 정태수 한보 총회장이 1천억원 가까이 YS를 지원했다는 증언으로 야기됐던 YS 대선자금 논란이 제기된 이후부터 계속되고 있다. 당사자인 김 전 대통령도 7월 6일 "한마디도 안할끼다"는 말로 안풍 판결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다. 오히려 기자들의 "잠을 잘잤냐"는 질문에 "내가 그만한 일로 잠을 못잘 것 같으냐"고 말했다.

어떻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김영삼 전 대통령도 불법의 족쇄란 위협 앞에 서 있다. 그 족쇄는 단지 법적 의미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칼국수를 먹으면서도 한 푼의 정치자금을 받지 않았던 YS. 그는 국민의 바람에 부응한 집권자였을까? 아니면 겉과 속이 다른 위정자에 불과한 것일까?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