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성폭력범에게도 '명예'는 있다?

최근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측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이른바 '역고소'가 증가하고 있다. 여성단체에 따르면 이는 '성관계 사실이 밝혀지면 좋지 않다'며 음성적으로 피해자에 압력을 가했던 과거와는 다른 양상이다.

역고소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여성의 의식이 깨이면서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더 이상 묵인하지 않으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현재 알려진 사건만 대구시립합창단 성희롱 사건과 동국대 ㄱ교수 사건 등 15건이 넘는다.

실명 밝히자 명예훼손으로 고소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정유석 성과인권팀 부장에 따르면 가해자의 역고소 유형은 크게 고소 시기별로 나뉜다. 먼저 피해자측이 고소하기 전에 먼저 역고소하는 경우이다. 미리 선수를 침으로써 혐의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피해자측의 공론화 노력을 무력화하려는 의도라는 게 정 부장의 얘기다.

피해자가 고소한 뒤 유죄판결이 나기 전까지 제기되는 역고소도 적지 않다. 수사기관이나 재판기관에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피해자측에 대해서는 협상 수단으로 삼으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성범죄 관련 재판은 비공개로 열리는 데 반해 명예훼손 재판은 공개된다. 피해자측으로서는 피해 사실 자체가 '노출'되는 부담을 안게 된다.

유죄 판결 뒤의 역고소는 가해자에게 너그러운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무죄를 주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한다. 명예훼손 재판의 주된 관심사가 성폭력 사실 자체의 유-무죄가 아니라 형법 제310조(명예훼손 조각 사유)에 해당하는지의 여부라는 점을 이용, '명예훼손 승소=성폭행 무죄'라는 면죄부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역고소와 관련해 가장 의미있는 사건은 대구 ㄱ대 ㄱ교수와 또다른 ㄱ대 ㅇ교수가 피해자를 도운 여성단체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심과 2심을 거쳐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역고소 사건 중 최초로 대법원에 올라간 사건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진실성'과 '공익성'에 대해 내릴 판단은 이후의 역고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될 전망이다.

ㄱ교수와 ㅇ교수는 모두 성폭력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으며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여성단체의 도움을 받았다. ㄱ교수는 2000년 5월 조교를 학과 일로 할 이야기가 있다며 호텔 객실로 데리고 가 성폭행한 혐의로 같은 해 6월 기소돼 11월 유죄 판결을 받았다. 대구 여성의 전화는 이 사건에 대해 2000년 10월과 유죄 판결이 나던 날, ㄱ교수의 성폭력 사실에 대한 내용을 실명을 명시해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렸다. ㄱ교수는 2001년 8월 ㅇ교수와 함께 대구 여성의 전화 공동대표 2명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이 두 역고소에 대해 재판부는 2심까지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우리나라 형법은 허위사실이나 허위사실을 적시하는 것을 명예훼손으로 규정한 뒤 사실이라 할지라도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일 때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예외 조항을 두고 있다.

재판부는 "ㄱ교수가 마취약을 술에 넣은 적이 없는데 약을 타 먹여 성폭행한 것으로 허위사실을 적시했다"고 밝혔다. ㅇ교수와 관련해서는 "기소되기도 전인 2000년 8월에 인터넷 등에서 밝힌 것은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올해 4월에 내려진 2심의 판결도 마찬가지 논리였다.

여성단체측은 1-2심 재판부의 판결에 불복,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여성단체측을 변호하는 이춘희 변호사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가 혼자 피해 사실을 알리고 법적 절차에 대응해 가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여성단체의 활동은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단체가 공개한 성명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ㄱ교수가 술에 약을 넣었다'는 부분인데, 가해자가 약을 넣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평소에 소주 1병을 마시고도 정신을 잃지 않던 피해자가 고량주 3잔을 마시고 7시간 정신을 잃은 상황에서 피해자는 가해자가 약을 넣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며 "피해자의 진술이 진실이라고 판단, 이를 성명서에 집어넣은 것은 여성단체가 가해자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마취약을 넣었다는 것은 강간 과정의 지엽적인 문제이므로 전체를 허위로 판단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서도 가해자 승소할지 주목

이와 같은 의견 차이는 우리나라 법이 명예훼손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진실성이 어디까지냐, 공공의 이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이 다른 것이다. 박선영 가톨릭대 교수(법학)는 "대법원은 주요사항이 진실하면 세부사항은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진실성을 인정해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부분이 세부사항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 때문에 마취약을 술에 넣었는지의 여부가 세부사항이냐 주된 사항이냐 의견이 다른 것이다.

공공의 이익이라는 부분도 모호하긴 마찬가지다. 대법원은 "공공의 이익을 국가-사회 기타 일반 다수인의 이익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특정한 사회집단이나 그 구성원 전체의 관심과 이익에 관한 것도 포함한다"고 판례를 남긴 바 있다. 공공의 이익을 넓게 해석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변호사의 주장도 타당하지만 하급심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이 내릴 판결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서로 배치된 주장을 시원하게 해결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역고소는 피해자에게 제2의 피해를 주기 때문에 자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여성단체측의 주장이다. 하지만 '꽃뱀' 등에게 속아 만들어지는 '성폭력 가해자'라면 역고소는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다. 이 부분에 대한 역고소는 여성단체에서도 공감하고 있다. 문제는 성폭력 범죄가 진짜로 발생한 경우의 역고소이다. 이에 대해 박선영 교수는 "대법원은 판례에서 '명예훼손적 표현의 위험을 자초한 것인지의 여부도 고려되야 한다'고 밝혔다"며 "가해자가 피해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것은 도의적으로 지나친 게 아니냐"고 말했다.

정재용 기자 politika95@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