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옥의 눈

힘보다 말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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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 지면에 쓴 칼럼으로 전향자라는 말을 들었다.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하는 진보정당의 현수막보다 보수정당이 내건 격려의 말이 위로가 됐다는 표현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전향’이라는 단어는 모욕으로 쓰인다. 지난 2월 민주당의 뉴민주주의연구소에서 젠더갈등의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토론회를 마련했다. 나는 다양한 입장 중 하나로 섭외되었지만, 다른 토론자가 나의 참여에 항의하며 보이콧하는 바람에 결국 무산됐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5·18 관련 대토론회에 망언자들을 대거 초대한 형국’이라고 했다. 나는 변절자에 이어 5·18 망언자와 동급이라는 오명까지 갖게 됐다.

[이선옥의 눈]힘보다 말이 먼저다

젠더갈등을 해소하자는 자리에 내가 토론자로 참여하는 게 어째서 망언자 초대에 해당하는지 공개적으로 물었으나 직접 답을 듣지는 못했다. 보이콧에 참여한 여성학자의 인터뷰를 통해 이유를 알게 됐다. 그녀들은 나와 다른 토론자 한 명을 ‘안티 페미니스트’로 규정한 후 우리가 ‘젠더갈등의 원인이 페미니즘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며, 페미니즘은 정신병이고 파시즘이고 반지성주의라 떠든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말한 바가 없으므로 위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설사 어느 안티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는 주장을 편다 해도 그게 왜 존재해서는 안 되는 표현이며, 그의 입을 막는 게 정당한지 설득의 노력 대신 물리력을 택했다는 점이다.

주장을 펴고,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고, 서로 토론과 논쟁을 거듭하면서 문제 해결의 접점을 찾아야 할 공론장이 사라지고 있다. 아니, 사라졌다. ‘말’이 놓여야 할 자리에는 ‘편’이 들어서고, 대화와 존중 대신 낙인과 배제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의견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고, 변절자나 망언자로 낙인찍는 일은 손쉽다.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결속이 단단해질수록 비판자에 대한 적대는 강화된다. 피아(彼我)의 전선만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다양한 의견은 설자리를 잃는다.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는 ‘망언’이 존재하는 사회보다, 힘 있고 목소리 큰 세력이 그 주장의 정당성이 검증될 기회를 막는 사회가 더 위험하다. 비판과 망언을 구분하는 일이야말로 공론장의 역할이며, 이를 물리력으로 막는 일은 지성의 반대편인 폭력에 가깝다. 어떤 존재든 성역이 아니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게 지성의 기본이다. 민주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상호 비판을 통해 더 나은 민주주의에 복무할 의무 또한 있다. 같은 이념을 공유하고 실천하는 집단일수록 내 생각이 여전히 옳은지,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지, 혹시 놓친 건 없는지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비판자와의 토론은 가장 효과적인 내부 점검장치다. 그래서 토론회의 무산이 안타깝다.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주장이 있다 해도 말을 통해 해결할 일이다. 언제나 말이 힘보다 먼저여야 한다.

<이선옥 작가·이선옥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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