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 명절 후 일 때문에 들른 단체의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밥을 먹게 됐다. 대표가 스테이크를 만들고, 간부 A는 디저트를 준비했다. 모두 50세가 넘은 남성들인데 일솜씨가 능숙했다. 설거지를 마친 후 식후한담에 들어갔다. “명절 잘 보내셨느냐”고 물으니 사과를 깎아 접시에 담던 A가 한숨을 쉰다. “어릴 때 봤던 친척 조카를 10여년 만에 만났어요. 훌쩍 컸기에 한마디했는데 딸아이한테 무례하고 성차별적인 말이라고 욕먹었어요. 친척들도 다 있는데 분위기가 싸해졌어요. 어렵네요….” 아직도 무안함에 얼굴이 화끈거린다는 그가 조카에게 한 말은 “세상에! OO이가 어른이 다 됐네. 시집가도 되겠다”였다.
“이번 명절에는 외모, 결혼, 취업, 성적 이야기 빠염!”
지난 추석에 내걸린 한 진보정당의 현수막이다. 평등한 명절을 보내자는 구호에서 더 나아가 가족과 친인척, 친구 사이의 대화에 금기를 지정하는 캠페인이다. 위의 주제어가 들어간 말에는 이렇게 쏘아 붙이라는 Q&A 답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명절 대화는 대부분 의미 없는 타인의 말과는 다른 차원의 염려들이며 호의에 기반해 있다. 불협화음은 세대 간 가치관의 차이, 사적인 영역에 대해 경계가 모호한 문화적 특성, 그리고 젊은 세대가 처한 경제적 어려움들이 맞물린 결과다. 이를 무조건 차별과 무례로 규정하고 단정적인 대응을 권하는 건, 지지대가 되어줄 관계를 파괴해 1차적 사회보호망을 무너뜨린다. 구체적 금기를 새로운 미덕으로 권장하는 진보의 평등관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다.
얼마 전 진보교육감이 수장인 서울시교육청에서 ‘쌤’과 ‘님’이라는 수평적 호칭제 도입을 발표했다가 호된 비판을 받았다. 호칭이 관계를 규정한다는 주장도, 실제적 평등이 본질이라는 비판도 일리가 있다. 다만 교육청이라는 기관이 이를 제도화하는 모양새는 국가가 풍속을 강제하던 시절의 구습을 떠올린다. 민족이나 계급 같은 전통적인 운동이 쇠퇴하면서 이처럼 사회적 차별의 철폐에 주력하는 운동이 부상했다. 편견에 기댄 언어가 곧 차별로 이어진다는 믿음은 일상적인 언어와 행동에 ‘운동적 규제’를 가하기 시작했다. 명절 풍습과 호칭 개선 모두 진보진영이 주력하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운동의 연장에 있다.
내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표현과 행동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욕구가 운동의 형식을 띠고 세를 얻을 때, 자칫 인간을 개조하고 지배하려는 부당한 욕망에 사로잡히기 쉽다. 보통의 생활인들이 호칭이나 용어 사용을 결정하는 기준은 ‘정치적 올바름’보다 관계의 온도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싶다면 이 기반을 존중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설득을 통한 변화보다 모멸감을 주는 방식은 오히려 공동체의 결속을 약화시킨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는 한가위 되세요!”
정치적으로 올바른’ 현수막보다 보수정당이 내건 격려의 말이 내겐 오히려 위로가 됐다. 과연 나뿐이었을까?
<이선옥 작가·이선옥닷컴 대표>